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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 파편(破片) 본문

기타

벤허 - 파편(破片)

승 :-) 2017. 10. 14. 22:09

정방형으로 잘린 바위는 인위적이다. 바위와 연결된 밧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다. 조금 더 시선을 옮기니 더 위태로운 인영이 보인다. 누더기라고 할 수도 없는, 주요 부위만 겨우 가린 천 쪼가리를 걸친 사람이 무겁디무거운 바위를 끈다. 바위는 흙바닥과 닿을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유대인.

 

나의 동포.’

 

동포?’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십니까?”

?”

아니, 아닙니다.”

전하란 건 제대로 전했겠지?”

. 그런데 유대인에겐 무슨 일로

옛 친구와 약속을 했었지.”

?”

어른이 되면

 

 함께 전차 경주에 나가자.

 

 

 

 

 

벤허 파편(破片)

 

 

 

 어떤 소음 속에서라도 자신의 이름은 유달리 또렷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곳에서야. 메셀라는 아까부터 귀에 날카롭게 꽂히는 말들에 고개를 푹 숙였다. 늘 같은 레퍼토리였다. “저 자식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재수 없게.”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해.” 메셀라는 조용히, 티 나지 않게 귀를 막았다. 저들은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적대감을 숨길 생각도 없는 그들은 여전히 아픈 말들을 쏟아내었다.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사고의 끝은 가시밭길을 돌고 돌아 결국 가장 아픈 종착역에 도달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가슴이 싸르르해지고 이윽고 목 안쪽에서 울컥, 하고 서러움이 쏟아지려 애를 쓰는 것이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지만 들을 때마다 견디기 어려웠다. 어째서, 어째서 아버지는 그렇게 나약했는가. 어째서 어머니는 쉽게 죽어버렸는가. 나약한 것은 지켜져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없애는 게 낫지 않은가? 그렇게 시작된 칼날은 결국 메셀라 자신을 향했다. 가장 나약한 건, 나 자신이 아닐까?

 

메셀라?”

 

 유다는 없어진 메셀라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중이었다. 메셀라가 좋아하는 전차 경기장 근처에도, 자주 다니던 시장에도, 저들만의 아지트였던 부서진 건물 옥상에도, 메셀라는 없었다.

 

, 너네 메셀라 못 봤어?”

, 그 이방인?”

아까 저 풀숲으로 들어가던데.”

고마워!”

 

 저 새끼는 대체 왜 그런 로마인 새끼를 감싸는 거야? 무리들의 날선 목소리가 귀 뒤로 스쳐지나갔을 때, 유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뭔가 잘못됐어. 불길한 예감이 자꾸 유다의 등을 떠밀었다.

 

메셀라!”

 

 얼마나 불렀을까. 저 멀리서 메셀라가 입고나간 붉은 색의 옷이 보였다. 유다가 가까이 다가가자 웅크리고 있던 메셀라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메셀라!”

 

 너 여기서 뭐해? 이윽고 제 친구의 얼굴을 마주한 유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너 뭐한 거야?” 유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일단 일어서. 유다는 엉망이 된 메셀라의 손을 이끌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팔이 미끄러졌다.

 

일어나. 가서 씻고 약 발라야지.”

…….”

메셀라!!”

넌 왜 나랑 노는 거야?”

?”

왜 나 같은 이방인이랑 놀아? 넌 귀족이잖아.”

너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또 걔네들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차가운 목소리와 달리 유다의 눈빛이 분노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메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유다는 자신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늘 도와주곤 했다. 아까처럼 또래의 유대인들에게 모진 말을 들으면 유다가 먼저 뛰쳐나가 그들을 쫓아냈는데, 그럼 그들은 그 다음엔 더 날카롭고 못된 말로 메셀라에게 복수를 했다.

 

일단 일어나. 너 이마 점점 부어오른다.”

그치만,”

아 걔네한테 뭐라고 말 안할 테니까 집에 좀 가자. ?”

 

 메셀라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다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유대의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었고, 자신은 유대에 침략한 로마군의 자식이었다. 유다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메셀라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너와 나는 시작점부터 달라. 메셀라는 이를 악물었다.

 

 

 

 

* * *

 

 

 


, 메셀라. 다 먹었니?”

, .”

 

 메셀라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애저녁에 끝났지만 메셀라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식탁 가운데에 놓여있던 포도에 손을 뻗었다.

 

!”

 

 차가운 손이 메셀라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유다의 집에 머물러 있는 하인이었다. 건드리지 마. 유다 주인님 거니까. 메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식당을 벗어났다. 식당을 벗어나기 무섭게 배에서는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메셀라는 자연스레 수돗가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라도 잔뜩 들여야 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난 로마 장교가 될 거야.’

 

 어느 날 메셀라가 유다에게 고백하듯 뱉은 말이었다. 유다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장교가 되면, 더 이상 로마와 유대가 싸우지 않아도 될 거야.’ 적어도 둘은 진심이었다. 조그마한 새끼손가락을 꼭 꼭 쥐고 엄지를 서로 꾹 맞찍었다.

 

 유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메셀라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집안의 하인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메셀라가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안에 우겨넣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셀라는 이 저녁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배부르게 먹어도 마음 속 어딘가는 공허했다. 그렇지만 메셀라는 먹고 또 먹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반쪽짜리 빵을 줄 지라도, 그들이 오로지 동정심만으로 자신을 대할 지라도 메셀라는 그 동정심을 씹어 삼켜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나약한 부모와 다르게 강한 어른이 되리라, 메셀라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다가 함께 있을 때는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유다가 수업이라도 받으러 갈라 치면, 그리고 메셀라가 심심함을 달래려 혼자 다니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메셀라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들이 주위에 어슬렁거렸다.

 

 저 놈이 로마군 자식이라죠?

 그러게, 벤허 가문에서는 저런 놈을 왜 들여서는.

 만났을 때 바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비위도 좋아요. 난 저런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말이야.

 쉿, 듣겠어요.

 들으라고 해. 수치심에 스스로 죽으면 고마운 거 아니겠어?

 

 네가 장교가 되면, 유대와 로마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될 거야. 메셀라는 저에게 날아와 꽂히는 창 같은 목소리들 사이에서 유다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뱃속이 뜨거웠다. 마치 새빨갛게 달궈진 돌을 집어 삼킨 것만 같았다.

 

, 이방인!”

 

 메셀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방인 주제에, 우리 말을 무시해?”

 

 메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이제 뱃속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따악! 소리가 들리는 순간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머리 전체가 울리더니 비틀, 하며 땅이 가까워졌다. 제 주먹 반만한 돌이 데굴, 하며 쓰러진 메셀라의 눈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정말 이렇게까지흐려지는 흙바닥을 배경으로 새된 소리가 날아들었다. “메셀라!”

 

 

 

* * *

 

 

 벌떡 일어난 메셀라의 눈앞에는 놀라서 넘어진 에스더의 얼굴이 있었다. 메셀라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으면 자신의 빵이라도 작게 뜯어 주던 착한 하인 중의 한 명이었다. 얼기설기 둘러맨 붕대는 메셀라가 일어나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메셀라?”

, 고마워.”

아까는 진짜 놀랐어. 걔네는 이제까지 너한테 그런 못된 말들을 했던 거니?”

아냐, 신경 쓰지 마.”

유다 주인님도 네가 쓰러져있는 걸 보곤 엄청 놀라셨단 말이야.”

 

 유다가 날 봤다고? 메셀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더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큰일 났다. 유다가 자신이 맞아서 쓰러진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메셀라가 하인들이 모여지내는 곳에서 벗어나 앞뜰로 향했다. 그 순간,

 

, 메셀라!”

 

 평소에 메셀라와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유대인 한 명이 정문으로 뛰어들었다.

 

유다, 유다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 빨리 뛰어, ! 머리가 울리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메셀라는 소리를 지르며 유대인의 신발 끝만 바라보고 뛰었다. 익숙한 풀숲을 지나 후미진 공터에 들어섰다. 무언가를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메셀라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윽고 메셀라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두세 명에게 둘러싸여 발로 차이고 있는 유다였다. 메셀라의 이가 악물려 턱 주위에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이 어떤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셀라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작고 약한 메셀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을 깨물고 밀치는 것 뿐 이었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유다가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힘이 빠져 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메셀라에게 달라붙어 열심히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 그들에게 유다가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둘은 바닥에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그들은 유다와 메셀라에게 침을 퉤 뱉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니까 유다 너도, 그런 이방인 새끼랑 같이 놀지 말란 말이야.”

 

 “빨리 꺼져.” 그들이 내뱉은 한 마디에 기어코 말대꾸를 했다가 한 대 더 얻어맞은 유다가 실실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부은 얼굴로 툴툴대며 메셀라가 말했다.

 

이렇게 너랑 같이 싸워본 게 처음이라서.”

 

 별 걸로도 웃는다. 메셀라가 여전히 입을 삐죽였다.

 

. 근데 넌 도대체 여기 왜 왔냐?”

 

 유다가 고개를 돌려 메셀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셀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터 바닥 위로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맑고 단단한 유다의 눈빛이 메셀라를 향했다. 메셀라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네가 여기 온 이유와 같아.”

 

 


* * *


 

 

 쿵, , ,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아팠지만 제일 위화감이 드는 건 눈이었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아무리 눈을 떠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메셀라는 몸부림 쳤다.

 

누가, 이 메셀라의 눈을 찢어 놨냔 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음에도 메셀라는 발작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면서도 메셀라는 소리에 집중했다.

 

멈춰!

 

 멈춰, 친구가 앞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군인들에게 메셀라는 소리를 지르며 들것에서 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메셀라는 결국 들것에서 떨어져 바닥에 넘어졌다. 적어도 허벅지와 갈비뼈 쪽이 부러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전혀 보이지 않는, 타들어갈 듯이 아픈 눈에 메셀라는 일부러 더 크게 모션을 취했다. 이제 더 이상 악밖에 안남은 메셀라가 소리를 질렀다.

 

이게 누구야, 오늘의 우승자, 유다 벤허 아니야!”

어디 있어.”

 

 자신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메셀라가 몸을 돌렸다. 틀림없이 제 친구 유다의 목소리였다. 처음에 들었던 맑고 친근한 목소리가 아닌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자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다의 몸은 불에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며 으르렁거리는 유다쪽을 바라보며 메셀라가 실성한 듯 실실 웃었다.

 

문둥이 동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충격을 받는 유다는 메셀라의 웃음소리도, 주변의 경멸스런 표정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메셀라가 뽑아든 단검을 보고 유다의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메셀라가 들고 있는 단검을 뺏으려 손을 붙잡자, 메셀라가 이로 유다의 어깨를 깨물었다. 당황한 유다가 순간적으로 칼을 놓치고, 당연히 자신을 향할 거라 생각했던 단검이 메셀라의 배로 향했다.

 

“!”

 

 유다의 입이 덜덜 떨렸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한 정적 속에 메셀라가 입을 열었다.

 

축하해.”

 

 메셀라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유다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메셀라는 천천히 다가와 유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메셀라의 입에서 피가 흘러 뚝뚝 떨어졌다.

 

네가 이겼어.”

 

 메셀라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우리 어른이 되면, 함께 전차 경주에 나가자.

 

 유다의 세계 한 구석이 산산조각 난 채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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