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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어떤 것은 입김이 닿는 순간부터 부패하기도 한다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어떤 것은 입김이 닿는 순간부터 부패하기도 한다

승 :-) 2015. 3. 7. 20:32



[또봇/셈한] 어떤 것은 입김이 닿는 순간부터 부패하기도 한다

 



 언제나 닿을 듯 닿지 않았던 그 옷자락을 드디어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뒤였다. 항상 그의 등 뒤에서 우물쭈물 했던 시간이 어언 5년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방황했었다. 내가 잘못된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가지게 된 상대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친구 사이에 오래 함께 얼굴 맞대면서, 부대끼면서 살다 보면 친구 이상의 감정도 생길 수 있고 친구보단 더 깊은 사이도 되고 싶고 한 것이 인간의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의 흐름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맞다고 믿고 있었다.

 

 비록 그 상대가 남자였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서 장장 5년간을 고민한 것이었다. 기억이 닿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는 늘 그 친구가 있었고 고개를 돌리는 공간에는 늘 그 친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친구사이로만 우리의 관계를 단정 짓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흑백논리로 나누는 것과 다름없는 인간의 감성에 대한 폭력이었다.

 그렇다. 솔직히 이렇게 쓸데없이 장황하게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다 내 자신을 포장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소꿉친구와 다름없이 함께 자란 남자인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게이였고 그것을 알게 된 지는 약 5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나는 현재 사춘기를 한참 지나 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동성애자란 뜻이었다.

 

나는 차하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한다.

차하나를 좋아한지는 약 5년이 넘었다.

조만간 고백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방아쇠를 당기기로 했다. 그 방아쇠를 당기고 난 결과에 따라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만약 차하나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친구로서의 차하나가 죽고 애인으로서의 차하나로 다시 태어날 것이고, 다른 마음이었다면 친구로서의 차하나도, 그리고 감정을 가졌던 권세모도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준비했던 모든 시간들이 희미하게 느껴질 무렵, 나는 단 두 발의 총알을 준비해갔다. 하나에게 쏠, 그리고 나에게 쏠 두 발의 총알.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그 모든 것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내 인생을 반전시킬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비하는 나는 이제까지 겪었던 폭풍 같은 과거들에 비해 너무나도 평온했다. 죽음 앞에 당도한 의연한 군사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그리고 표적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제껏 준비했던 방아쇠를 당겨야 할 상대. 그가 카페로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당신은 여전히 예쁘네. 이제까지 내가 그 힘든 게이로서의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앞에 앉아있는 하나 덕분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를 보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삶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일 때 그 끈을 이어준 사람이 바로 하나였다. 그는 내 인생의 생명줄과도 같았다.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세모야?”

 

 하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저 웃음에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구원받아왔다. 왠지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기분에 나 역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당황하지 않고 들었으면 좋겠어.”

 

 하나가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궁금하다. 앞에 시켜둔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번 쭉 빨아들인 하나가 머그컵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빠르고 쉽게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오만한 자신감에 젖어있었던 불과 한 시간 전의 자신을 때리고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나는 하나 앞에서 입도 벙긋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집에서는 여러 말들을 고민하고 결정한 뒤 뾰족한 정으로 치고 때려 다듬었지만, 결국 떠오르는 말은 사실 나는 너를 좋아해. 와 같은 너무나 상투적이고 촌스러운 멘트 뿐이었다. 평소 암기에 젬병이었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내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 차라리 모른 척 하고 도망쳐버릴까. , 사실 예전에 나 너 장난감 몰래 가져간 적 있다! 식의 허접한 거짓말을 해버릴까.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는 하나 앞에서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

 

 항상 구원받았던 하나의 미소가 나를 옥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고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아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상태가 이상했는지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해, 권세모. 내 안의 다른 자아가 그렇게 소리쳤고 또 다른 자아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나를 말렸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그 두 자아 중 한명을 쏴버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죽는 쪽은 누구?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방아쇠에 손을 걸쳤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세모야?”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고 비겁한 질문이었다. 하나가 뭐라고 대답하길 바랬기에 나는 이처럼 도망치는 듯한 질문을 던진걸까. 그러나 너무나 모순적이게도 내 가슴은 그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두근거렸고 그에 대해 나는 자괴감을 느꼈다.

 

좋은 친구?”

 

 심장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고 나는 당장이라도 이 카페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거절 아닌가? 하나의 얼굴이 난색을 띄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새하얘졌고 그것을 눈치 챘는지 하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왔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거든. 그것도 5년 동안. 나는 방아쇠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당길 수 있을 정도로.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처럼 나는 결연했다. 차가운 총구가 관자놀이에 와 닿는 느낌이 들었고, 그 차갑고 무거운 금속의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차마 하나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서,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감았던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하나가 나를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까. 혐오스럽다는 표정? 아니면, 혹시라도 감격스러운 표정? 그 어느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 나는 암전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끝없이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몸을 이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고 마치 수면 아래 잠겨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액체들로 잔뜩 막힌 듯한 호흡기에 숨을 쉬기가 버거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 *

 

 

 

 눈을 뜨자 눈앞에 하나가 꽉 들어차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묘하게 웃는 것 같은 표정도, 울 것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건, 어느 쪽이든 긍정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고 심지어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나는 차마 하나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어 애꿎은 그의 파란색 셔츠 끝자락만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확실하게 시선에 걸리는 그의 눈동자에 나는 도저히 버티고 앉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 .”

 

 그랬구나. 나지막히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에 나는 이제 미칠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말해줬음 좋겠어.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하, 하나가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내게는 지옥으로의 행진곡과 다름없게 들렸다. 이제는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방아쇠를 당겨 총알을 쏘았고 결국 우리 둘 다 죽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

 

너 게이야?”

 

 그러나 차하나는 다시 살아났고, 산탄총을 맞아 잔뜩 찢겨진 내 몸에 칼을 찔러 넣었다. 세모야. 이렇게 찌르면 아파? 그가 그렇게 묻는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묻잖아. 너 남자 좋아해?”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었던 하나의 차갑고 무겁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저을까 생각했다.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몰래카메라였어! 어때? 나는 순간적으로 대안을 생각해내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끝없는 비참함을 느꼈고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었다. 죽은 나를 보고 측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짓밟아 없애는 차하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향해 차하나가 총을 꺼내들었다.

 

대답해 권세모.”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잠금쇠를 풀고 방아쇠에 손을 건네는 차하나. 그에 비해 총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는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먹잇감과도 같았다. 그러나 차하나는 일말의 동정도, 아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분노라도, 혐오라도 담고 있었다면. 그 눈동자에 조금이라도 나에 대한 감정이 들어있었더라면 나는 덜 비참했을까.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눈에 내가 좌절하고 있을 무렵 차하나는 방아쇠에 손을 주고 힘주어 당겼다.

 

더러워.”

 

 그 총알은 오롯이 나를 향해 와 내 몸에 하나하나 박혔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수많은 결말을 상상하고 또 기대했었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렇게 차하나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갔다.

 차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들은 얘기로 할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카페를 빠르게 벗어났다. 나는 마치 패잔병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있었다. 만일 이 곳이 전쟁터였다면 의자 뒤에도 잔뜩 총알이 박혀 있었을 테였다. 웃음이 나왔다. 분명 여러 발의 총알을 맞았음에도 나는 살아있다. 그것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모순적이어서 절망 속에서 나는 유머를 느꼈다.

 차하나가 벗어난 자리에는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차하나는 나에게 온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눈앞이 흐려져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렇게 끝이구나. 차하나도, 나도. 나의 5년도. 깨져버린 유리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아도 다시 원래의 유리로 돌아갈 수 없듯이 차하나와 나의 사이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렇게 된 거 다시 끌어 모을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아예 산산조각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하나. 전화번호부에서 차하나의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사실 전화번호 따위는 진즉에 외우고 있었지만 그저 치졸한 자존심이었을 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눌러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전화번호 삭제를 표시하는 빨간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것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상처를 헤집고 펼쳐 보인 상대에게 가질만한 갈등의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5년간 좋아했던 상대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 카페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카페 바깥으로 나가자 시원한 밤공기가 폐로 들어왔고 나는 그제서야 어항 밖에서 숨을 헐떡이다 겨우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삶이 카페를 들어갔다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뉘는 것 같았다. 그 이전의 권세모는 차하나가 인생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죽었다. 지금의 권세모는 차하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권세모였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또 하나의 세계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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