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이 존재하는 글입니다. 가급적 PC에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봇/셈한] 둘만의 공간
교실의 공기가 축축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날이 잔뜩 흐린 게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수학시간에 가우스실로 가는 길엔 마치 습기가 몸에 척, 척 하고 달라붙는 것 같았다. 아, 우산 안 가져왔는데. 하나는 그제서야 아침에 무거운 가방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꺼내두었던 우산이 생각났다. 어떡하지. 학교에 놓고 갔던 우산 없었나. 둥실 둥실 떠오르는 여러 생각에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몸은 이미 교실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 비 온다! 누군가의 외침에 교실에 있는 모두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 역시. 운동장의 모래는 이미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투둑, 투둑하는 빗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하나는 아무도 모르게 포옥 한숨을 쉬었다. 집에 어떻게 가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벌써부터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 역시 비가 오는 날은 싫었다.
비가 오는 날은 늘 이랬다. 딱히 이유도 없는 두통과 알 수 없는 허무감이 하나를 휘감았다. 그럴 때면 기분이 땅 끝까지 꺼졌다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진득한 흙탕물에 빠진 것 같았다. 안 돼. 하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험 직전인데 이런 우울감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다시 칠판을 보려고 든 머리가 무거웠다.
두리와 하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 두리는 체육 특기생으로 진학해야 했기 때문에 집이 아니라 기숙사에서 통학하고 있었다. 이럴 때 두리라도 있었다면. 두리는 쌍둥이라 그랬는지 유독 하나의 기분을 잘 알아챘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두리는 더욱 하나에게 짓궂게 굴곤 했다. 그게 하나의 우울감을 덜어주고자 했던 일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두리가 없는 이런 날씨를 맞이한 날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수식을 공책에 잔뜩 받아 적긴 했는데, 전혀 집중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는지 쉬는 시간에 다시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딩요한테 물어봐야 하나. 하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창밖에는 야속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복도도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것 같았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마치 물에 젖은 스펀지가 하나의 발을 쑥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또 다시 지끈대는 머리에 하나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 * *
점심을 먹고 나서도, 7교시가 지나 종례를 할 때에도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 상태에 비까지 맞고 집에 간다면 분명히 감기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시험 기간에 감기라니. 하나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의 하나는 아주 예민한 상태였다.
초등학교도 아닌데 교문 밖에는 아주머니 몇 명이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애도 아니고.’ 학교 입구에서 멍하니 운동장을 쳐다보던 하나의 속이 그들을 본 순간 잔뜩 꼬였다. 동시에 쳐드는 부러움. 이럴 때 엄마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준다면. 하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아마, 자신의 머리와 마찬가지로 지끈거리는 다리에 끙끙 앓고 계실 것이다. 순식간에 자신을 휘감고 드는 여러 감정에 하나는 차라리 비를 맞고 뛰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야.”
누군가 하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같은 반인 권세모가 한쪽 헤드폰을 뗀 채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하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젖은 얼굴을 손으로 슥슥 닦았다.
“너 우산 없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이성과는 달리 이미 끄덕이고 있는 고개는 솔직했다. 세모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은 하나였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산만을 바라보는 하나를 보며 세모는 입을 열었다.
“같이 쓸래?”
그게. 아무리 봐도 우리 둘이 쓰기엔 좁을 것 같단 말이지.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확실히 고등학생 남자애 둘이 쓰기엔 작은 우산이었다. ‘같이 썼다간 둘 다 애매하게 비 맞을 텐데. 그럴 바에야 혼자 쓰는 게 낫지 않나. 나는 괜찮은데. 아, 괜찮은 건가? 그것보다 얘 뭐지. 나랑 말도 별로 안 해본 앤데. 왜 갑자기 우산을 같이 쓰자는 거지.’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남들이 보면 뻔히 드러나는 사고의 흐름에 세모는 하나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너 상태도 별로인 것 같던데. 그냥 같이 쓰고 가자.”
세모가 하나의 어깨를 붙잡은 채 그대로 우산을 폈다. 팡하고 펴진 우산 안이 순식간에 두 명의 남자로 가득 찼다. 확실히, 비를 오롯이 다 맞고 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공간 안에서 넘쳐흐르는 어색함이었다.
“어, 저기. 고마워.”
“됐어.”
생각보다 더 단답으로 끝난 말에 하나는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맞닿아 있는 어깨가 따듯했다. 이런 걸로 괜찮은 거였나. 조금 나아지는 기분에 하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우울함이 풀어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두리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닿은 어깨가 순간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나는 자리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너네 집 어디야?”
갑작스럽게 물어온 질문에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모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하나는 하마터면 우산 밖으로 뛰쳐나갈 뻔 했다. 뭐야. 왜, 사람을, 저렇게 빤히…. 하나는 순식간에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도 까먹은 채 고개를 돌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
세모는 세모 나름대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질문이 잘못됐나. 그런데 집이 어딘지 알아야 데려다주던 말던 할 텐데. 세모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너네 집 어디냐고.” 그러자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대답했다.
“아냐! 이제 됐어! 이 앞이야, 이 앞!”
“이 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인가. 세모는 볼을 살짝 긁적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데려다 줄 테니까, 집 어딘지 말해.” 그러자 하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나는 하나대로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자신의 옆에서 과도한 호의를 베푸는 이 같은 반 남학생의 존재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괘, 괜찮은데.” 하나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세모가 한숨을 푹 쉰 뒤 자리에 멈춰 섰다. 덕분에 하나는 그대로 앞으로 가다가 우산에 이마를 부딪히곤 이상한 소리를 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끙끙댔잖아.”
그걸 어떻게… 라고 말하기도 전에 세모의 큰 손이 하나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그리곤 우산 안으로 집어넣었다. “보면 알아.” 무심하게 말한 세모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돼? 왼쪽…. 여기선?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돼. 택시라도 탄 것 같은 기분에 하나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세모의 손이, 그리고 맞닿아 있는 어깨가 뜨거웠다.
그것을 눈치 채자마자, 하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상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하나의 머리가 아픈 것을 눈치 챈 것은 쌍둥이인 두리 뿐이었다. 아버지에겐 걱정하실까봐 말씀도 안 드렸지만, 아버지 역시 하나가 고질적인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은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한 같은 반 권세모가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알아볼 줄이야. 하나의 마음속에 있던 우울감을 밀어내고, 다른 어떤 감정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네 집은 어디야?”
“여기서 가까워.”
“아, 그렇구나….”
복잡해진 머릿속과는 달리 너무나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대화에 하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세모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헙, 하는 소리를 냈다.
“요즘 날씨엔 언제 비 올지 모르니까 우산 맨날 챙겨서 다녀.”
“응.”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챙겨준 것이 얼마만이었던가. 쌍둥이임에도 장남이라는 위치에 있던 하나는 늘 사고뭉치인 두리에 비해 뒷전으로 밀려났었다. 아버지는 우리 둘을 똑같이 대하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하나가 생각했을 땐 아니었다.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에 하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세모에게 안겨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구나. 그것을 깨달은 동시에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에 하나는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너, 근데 머리는 괜찮냐.”
하나가 빨개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한 채 세모를 쳐다보자 세모는 하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수업시간 내내 머리 꾹꾹 누르길래.”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하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달아올랐다. “응. 괜찮아.” 하나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정말?”
“응, 정말.”
단지 그 한마디였을 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머리를 울리던 동통이 조금 가시는 것도 같았다. 비가 내린 뒤의 하늘이 유난히 맑듯 하나의 머리도 조금 가벼워졌다. 여전히 그 좁은 우산 밖의 세상엔 비가 잔뜩 내리고 있었는데도, 하나의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산 속의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현관까지 데려다줄게.” 세모가 말했고 하나는 군말 없이 대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고등학교 들어와서 친구를 집까지 데려오는 건 세모가 처음 아닌가? 어느 새 현관 앞에 도착한 하나가 폴짝 뛰어 비가 닿지 않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 그, 뭐 따듯한 거라도 먹고 갈래?”
“됐어. 간다.”
세모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하나가 붙잡을 새도 없이 대문 밖으로까지 나간 세모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나의 주변을 이제는 빗소리가 오롯이 감쌌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소리도 묻힐 정도로 거센 빗줄기가 시원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비가 많이 왔구나. 새삼 느껴지는 날씨에 비해 자신의 옷과 몸은 신기하게도 뽀송뽀송했다. 아! 무엇인가 깨달은 듯한 하나가 다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뒤돌아가는 세모의 뒷모습을 보았다. 세모의 한쪽 어깨가, 비로 잔뜩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 하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새빨개졌다. 우산을 쓰고 온 보람도 없이, 하나는 그 자리에서 세모가 사라질 때까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맑고 상쾌했다. 대신, 두근거리는 가슴이 오랫동안 하나를 울렸다.
“…고마워.”
듣는 이 없는 감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