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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아리아드네의 실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아리아드네의 실

승 :-) 2015. 9. 10. 21:41

[또봇/셈한] 아리아드네의 실



 뺨에 와 닿는 밤공기가 차다. 짙게 가라앉은 공기만큼 너와 나 사이의 거리도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네가 왜 왔는지 알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온갖 감정을 업고 온 너에게서 그것들이 한꺼풀씩 벗겨졌을 때, 너는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너를 보고, 나는 도저히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잘 지냈냐는 안부인사 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너는 잘 지냈을 것인데. 나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치고 너무나 안 좋은 너의 얼굴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다.

 한참 동안 계속 된 침묵에 결국 입을 먼저 연 건 나였다. “소식 들었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도, 그도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 이런 주제로 말을 꺼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허공에서 얽힌 시선이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막막할 정도로 엉켜 있었다. 잠깐 동안 마주친 시선은 이내 감정의 실을 길게 늘어뜨리며 다시 바닥을 향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우리 둘만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한 때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그림자를 쫓아가는 것처럼 잡을 수 없는 사랑을 좇던 때도 있었지.

 

…….”

 

 감정이라는 실로 단단히 꿰매어진 너의 입술이 열릴 줄을 몰랐다. 역시 잘 지냈냐는 가벼운 안부로 시작할 걸 그랬다. 아마도 나는 성격이 나쁜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이렇게라도 네게 생채기를 주려고 한 것 보면. 고개를 주억거리는 네 얼굴이 이 세상 누구보다 초라해 보여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당당하던, 늘 반짝반짝하던 너는 어디가고, 내 앞에는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 같은 얼굴을 한 네가 있다.

 

세모야.”

 

 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그의 눈꺼풀이 잔뜩 부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너의 눈가가 반짝거려서 순간 내 코끝도 잠시 시큰거렸다. 예전에는 그랬지. 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 입을 맞추었을 때, 마침내 영원을 약속했을 때는 그랬다. 너의 얼굴 전체가, 온몸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흩어져 내렸었다. 그 빛이, 사랑이란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눈가를 밝히고 있는 그것은 사랑도, 그 어떤 것도 아닌 너의 죄책감이었다. 나에게서 도망쳐 현실을 선택한, 그 선택에서부터 비롯된 죄의식, 미안함 등이 잔뜩 엉켜 흐리게 반짝였다. 그것은 더 이상 맑고 투명하지 않아. 흙탕물처럼 뒤섞여버린 감정들이 이제는 지저분해보일 정도라 나는 그저 그것에게서 눈동자를 옮겼다.

 네가 입을 연다. 입을 단단하게 옥죄던 감정들이 투둑, 하고 뜯겨져 나간다.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네 입술이 서로 떨어졌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그것들. 뚝뚝 떨어지지만 결코 네게서 떨어지지는 않는 그것들. 그렇게 혼자만 마치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자인 것 마냥 굴 때는 언제고, 너는 이제 와서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감정들.

 

얼굴 봤으니까 됐어.”

 

 목이 잔뜩 메인 목소리로 네가 말한다. 그만 들어가 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네가 말한다. 나는 나에게까지 엉겨 붙은 감정들을 툭툭 털어냈다. 그대로 뒤를 돌자 그제서야 네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식. 난 안 갈게.”

 

 마지막까지 모진 말을 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발걸음을 뗄 때마다 끈적끈적해진 땅바닥이 발바닥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그것들을 억지로 뜯어버린 채, 나는 그렇게 집으로 들어왔다. 어둡다. 춥다. 가슴에 그나마 남아있던 한줄기의 따듯함마저 완전히 식어버린 것 같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창가에는 여전히 가로등이 켜진 것이 보였다. 도저히 창밖을 내다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흐리게 다가오는 불빛만을 보았다. 불빛이,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권세모. 넌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야? 한참 뒤에 뻣뻣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나 바라본 가로등 옆에는, 누군가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 깨닫기도 전에, 나도 그만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우리 모두를 덮쳤다. 이리저리 휩쓸리다 숨이 막혀오는 가운데에서도 끝끝내 보인 것은 결국 권세모,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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