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Wind-up!
[또봇/셈한] 피어오르다 본문
부드런 턱선을 따라 열리는 입술은 마치 꽃봉우리
그녀의 깊은 눈망울이 알려주는 우리 갈 길은 바로
사랑이라고
*
[또봇/셈한] 피어오르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있어.’ 어제 술자리에서 스쳐지나가듯 말한 선배의 말이 귓가에 울리고,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바람에 찬 기운이 실려 오더니 오늘은 공기 자체가 포근한 느낌이었다. 이미 개나리는 만개해 주변은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봄기운이 만연했다. 땅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같이 내 마음도 일렁댔다.
봄은 흔히들 말하는,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그러니까, 봄이 되면 사람은 절로 마음이 들뜨는 법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저기, 대도시청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러니까, 가던 길을 되돌아 와 뻔히 아는 길을 물은 것은.
“저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상투적인 인사말을 내뱉고 미친 척,
“감사해서 그러는데 커피 한 잔 사도 괜찮을까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 나서,
“좋아요.”
뛸 듯이 기뻤던 대답을 듣고 난 뒤,
한 달이 지났다.
* * *
이제 바닥엔 목련 잎들이 누렇게 떨어져 가고 있었다. 벚꽃들이 발에 채이는 것이 괜히 꼴 보기 싫어졌다. 벚꽃 아래서 연인들은 사진을 찍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실루엣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오똑하게 솟은 코, 선하디 선한 눈망울에 담고 있던 세계는 내가 보았던 그 어느 것보다 맑고 깨끗했다. 봄바람이 온통 그를 감싸는 것처럼 다른 곳보다 그의 주변에 있던 공기는 더욱 따듯했다. 그의 깔끔한 콧날이 나를 향하고, 단정한 입술이 목소리를 낼 때 나는 미친 척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수작’을 건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급하다는 듯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임에도 샷을 하나만 넣은 연한 커피를 들고 그대로 갈 길을 가버렸다. 전화번호조차 교환할 시간이 없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길 하나 물어본 걸 대답해준 것 가지고 커피까지 사준다는 사내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목련꽃 같은 사내. 그의 첫인상은 나에게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새하얗고, 깨끗함 그 자체의 이미지. 그러나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금방이라도 변색될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봄이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이젠 길거리에 더 이상 아지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기운 위에서 나는 더운 한숨을 쉬었다. 우울한 늦봄이었다. 늘어진 봄에 나는 뒤늦게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건널목에서 고개를 든 순간, 목련꽃 한 송이가 다시 한 번 피어올랐다.
“안녕하세요.”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그를 앞질렀다. 역시나, 목련을 닮은 그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가 나를 기억했다는 사실에 축 늘어져버린 감정들이 다시 팽팽하게 예민해졌다. 한 번 마주치면 우연이라지만 두 번 마주치면 인연이라는데요. 되도 않는 온갖 핑계가 머릿속에서 팽글팽글 널을 뛰었다.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말들을 꿀꺽 삼킨 뒤 겨우 튀어나온 한 마디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시간 있으시면, 영화라도.”
그게 제가 영화 관람권을 받아서. 구차한 변명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지금요? 되묻는 그의 입꼬리에 웃음이 가득 묻었다. 어이가 없으시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멍청이 같죠. 자책감이 가슴을 쿵쿵 때릴 때쯤,
“그래요.”
부드러운 카푸치노 색 머리칼이 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따듯함을 담은 바람이 불어 그의 이마를 간질였다. 그가 머리를 넘기며 햇살처럼 웃었다.
“가요.”
드디어, 내 마음 속에도 꽃이 피었다.
*Kinetic Flow - 4월에서 8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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