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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정리(整理)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정리(整理)

승 :-) 2016. 3. 5. 22:16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tyxaD





[또봇/셈한] 정리(整理)




 햇빛이 이렇게나 맑게 비추는데 이상하게도 뺨에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남자는 코트 깃을 세운 손을 하나로 모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마치 설원을 걸어가듯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2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차고, 또 차운 바람이 남자의 가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인연이란 것은 가끔씩 이성이나 과학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코트 깃 안으로 고개를 파묻은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 막연히, 그저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고, 시선을 위쪽으로 든 순간.

 

 남자는 모든 시간이 멈춘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시간은 멈추었고,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내 역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다른 이들의 시간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러나 그들은 아니었다. 둘은, 차마 다가가지도,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한 채, 오직 눈을 맞추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서로를 담으려는 것 마냥 둘은 계속 서로를 그렇게 쳐다보기만 했다.

허공에서 부딪히는 시선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둘을 깨웠을 때, 그제야 그들은 가려던 발걸음을 그대로 옮겼다. 그 새 솟아난 질척한 감정들이 발걸음을 턱턱 붙잡았다. 끝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감정들을 힘겹게 뜯어낸 사내 둘은 남들보다 조금 느린 발걸음으로 서로의 목적지로 향했다.

 

 10년이었다.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 새로 짭짤한 액체가 쉼 없이 새어 들어왔다. 눈앞이 쉴 새 없이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속에서는 끅끅대며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가 난데없이 잘 있으라고 통보하고 떠난 것이 장장 10년이었다. 소꿉친구였고, 막역한 죽마고우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에도 10년이 걸렸다. 그 빌어먹을 10년을 어떻게 잊었는데, 10년 만에 그는 마법처럼 자신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이제 빈 골목을 찾아 들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속에서 대체 얼마만큼의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는지 모를 만큼 사내는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퉁퉁 부어오른 눈이 차가운 바람을 만나 아릿했다.

 

 10년 만에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몇 초간 눈을 마주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서러워서, 대체 왜 그 때 날 떠났냐고 일갈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입도 벙긋 못하고 울음이나 터뜨리는 자신이 멍청해서 남자는 문득 울음을 멈췄다.

 

 그 때,

 

하나야.”

 

 10년의 시간이 성큼 앞으로 건너뛰었다. 그 때에도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을 가득 담아 불렀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여야 하는데. 남자는 또 다시 멍하니 그에게 시선을 둘 뿐이었다. 10년간의 감정들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저마다 먼저 나오겠다고 엉겨 붙은 탓에 그는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미안해.”

 

 뛰어왔는지 추운 날씨에도 숨을 헐떡이는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제야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넘긴 머리, 조금은 거칠어졌지만 그 때와 똑같은 얼굴. 너무나 달라진 것이 없어 남자는 오히려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너는, 멀쩡했구나.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을 하고 일어난 남자가 다른 이를 그대로 지나쳤다.

 

차하나. 얘기 좀 해.”

 

 남자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손목을 붙잡힌 남자가 세게 그 팔을 뿌리쳤다. 자신의 손목을 잡은 남자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번째 손가락에. 남자는 굳이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어도 그의 손을 뿌리쳤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차갑게 뿌리쳐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찬바람을 내며 그를 지나친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찐득거리던 감정을 잡아 뜯은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그 순간부터 남자의 10년은 아득한 기억의 낭떠러지 어딘가로 부서져 내렸다.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썹이 자꾸 내려갔다.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그의 청춘은 그렇게 사라졌다. 남자는 집에 가서 그가 담긴 모든 사진들을 이제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남자가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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