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Big Wind-up!

[또봇/셈한] Oasis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Oasis

승 :-) 2015. 8. 9. 10:51

[또봇/셈한] Oasis

 


 

권세모.’

사랑해.’


 입 안에서 맴돌다 흩어진 단어들이 스르르 녹아버리길 몇 번, 나는 몇 번이고 사랑을 말하고 싶었으나 그에게 들릴 리 없었다. 방 안에 혼자 남겨져 있는 그 기분이 싫어 무릎을 모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이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는 건 싫어. 창밖은 비가 내렸다. 번쩍, 하고 창문이 빛으로 가득하더니 이내 집안을 울릴듯한 천둥소리가 내리쳤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지만 진동은 여전했다. 마음속까지 울리는 듯 감정이, 비가, 내 주위의 모든 것이 휘몰아치며 나를 때려와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아주 큰 천둥이 공기를 때려 아주 잠깐 휘청했지만, 비틀거리며 나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알았다. 이것은 환청이라는 것을. 아니야. 그가 온 게 아니야. 고개를 저었지만 여전히 현관문에서는 주먹이, 그의 주먹이 단단한 차가운 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까지 그런 환청을 들은 것이 몇 번째였던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 나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하라고!!”

 

 나는 악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그는 이렇게 달려왔었는데. 문을 열면 그가 우산을 쓰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한 손에는 따듯한 음료를 들고. 무서웠지? 웃으며 내 집에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온 그에게서는 비 냄새가 났다. 그에게서 묻어온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하늘을 찢는 듯한 소음에도, 따듯한 음료 한잔과 함께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내 머릿속까지 쪼갤 듯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가 얼얼해 나는 어디로 숨어야할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그저 바닥에만 주저앉아 있었다.

 

차하나. 문 열어.”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번에는 입을 막았다. 이건 환청이 아니야. 진짜 사람이 있어. 수천 번을 들어도 달콤한 목소리, 절대 잊혀지지 않을 목소리를 가지고 그가 왔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환희가 파도쳤으나 나는 그저 손으로 입만 막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지면을 때리는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방 안에 똑, , 하고 울려 퍼졌다. 방 한 구석에 떨어진 액자가 보였다. 뒤집혀 있어 어떤 사진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어떤 사진인지 알 수는 있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어떻게 찍었는지도, 어디서 찍었는지도.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날의 광경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빗소리로 머릿속이 가득 차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금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오롯이 나에게로 쏘아졌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해온 시간에 비해 너무나 얇디 얇은 쇠 문 사이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한 쪽은 돌리고, 한 쪽은 붙잡고만 있는 채로.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노력하지 않는 나와 늘 나에게 맞춰주려 노력하던 네가, 언제부터였을까. 조금씩 지친 표정을 짓기 시작했을 때.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너는 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계속되는 물음 속에 너는 혼란스러워했고 부정과 부정의 연속에 갇혀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했다. 깊고 좁은 골 사이에 떨어져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네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내가 없었다. 공허하고 텅 빈 눈동자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때부터 나의 세상도 감정이 누수해버려 메말라버린 사막과 같은 곳이 되었다. 너와 함께하면 늘 반짝이던 세상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아. 퍼석하게 흙먼지만 피어오르던 그 세상 속에서 나는 갈 곳을 잃은 채 헤매고 있었다. 밖은 비가 쏟아졌지만 내 마음은 더더욱 갈라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에 네가 찾아온 거야. 말라버린 나의 세상에 유일하게 생명수를 줄, 구원과도 같은 오아시스. 그러나 나는 감히 그 것에 손을 뻗지 못하고 신기루일 것이라 단정 지었다. 어쩌면 나는 깨달은 거지. 마치 가득 채울 수 없는 신비의 우물처럼, 아니 혹은 그것보다 더욱 질이 나쁜 것일 수도 있겠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어, 혹은 커다란 구멍이 나있어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그런 나의 결핍 상태가, 결국은 너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한쪽은 영원히 사랑을 말하고, 한쪽은 영원히 결핍을 말하고 있는 관계는 만나면 만날수록 불행해질 뿐이야. 나는 네게 그렇게 고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세계는 점점 더 말라갔다. 계속해서 말라가는 식물은, 누군가 물을 주지 않으면 곧바로 죽어간다. 나는, 아무 대가 없이 오직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낌없이 물을 주는 네게 감사해 했어야 했는데.

 그 뒤로도 꼬박 한 달간을 그렇게 죽어가던 내게 네가 찾아왔다. 문을 여는 순간, 쏟아지는 비들은 오롯이 나에게로 들어와 생명수가 되겠지. 살기 위한 맹목적인 욕구와 한 꺼풀 밖에 남지 않은 얄팍한 이성이 치열하게 다퉜다. 그러다 문득, 이것은 단지 나의 오만에 불과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사고를 잠식했다. 권세모가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그렇게 심한 말을 듣고도 찾아온다? 한 달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던 권세모가?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지.

 

 그러나 권세모라면 가능했다. 사랑으로 넘쳐나는 사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잠금쇠를 풀었다. 철컥 하고 돌아가는 소리에 그가 문고리를 돌렸고 내 손은 힘없이 그의 쪽으로 딸려갔다. 화악 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 공기. 축축하고 비린 내음이 가득한.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권세모의 향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비만이 가득한 바깥, 빗소리와 하나 된 권세모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투둑, 투둑 하는 소리를 내며 비는 권세모의 온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멍청히 권세모만 바라볼 뿐이었다. 입술은 자물쇠처럼 꾹 다물려 열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여전히 비와 함께 권세모는 밖에 있었다. 늘 비를 몰아내던 태양 같던 권세모가 그렇게 흐린 먹구름이 되었다. 여전히 흐린 눈동자를 한 채.

 

마지막으로 보러왔어.”

 

 권세모가 입을 열었다. 그 말뜻을 알아채기도 전에 한 단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 순간 굳게 다물려있던 입에서 목소리가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마지막이라니, 무슨 뜻이야?”

 

 권세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있는 이쪽과 권세모가 있는 그쪽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나와 권세모 사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으면 되는데, 나는 그것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가볼게.”

 

 권세모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래, 너는 항상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나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너는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와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턱턱 막혀 가슴을 쥐어 잡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했어?”

 

 그 말에 그의 뒷모습이 우뚝 멈추었다. 쏟아지는 장대비 덕분에 흐릿하게 보이던 그의 등이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도 작게 보였다. 너도 결국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빗속을 뚫고 그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사랑했어.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갈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를 뒤집어 쓴 채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온 몸을 냉기가 덮쳐와 나는 양쪽 팔을 감쌌다. 지금은 아니야.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아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현관에 주저앉은 나에게 바람이 휘몰아쳐 빗방울이 들이쳤다.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내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건 권세모 뿐이야. 그것을 깨달은 뒤에는, 이미 나는 생기 없이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을 한 채였다.

 이미 시야에서 벗어나버린 그를 끝까지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잘 가, 세모야.”

 

 권세모, 나의 오아시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빗물이 들어오는 현관문을 닫았다. 그렇게 또 다시 나의 세계가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