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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셈한 전력 24시, '너와 나의 오늘'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셈한 전력 24시, '너와 나의 오늘'

승 :-) 2015. 10. 31. 23:10

 

 

.”

 

 또 이런다. 하나는 또 다시 눈을 비볐다. 요즘 들어 자꾸 이러네. 간지럽지도 않은 눈을 비비자니 금세 발갛게 부어오른 눈꺼풀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아지지 않는 시야에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6개월 정도 됐을까,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하나가 가방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먹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눈앞이 흐릿해진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특히 더 심해졌고, 그 빈도도 잦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하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기분 탓인가. 눈이 나빠졌나.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하나가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순식간에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바닥에 하나가 가까스로 팔을 짚었다. 그러나 진하게 밀려드는 통증이 팔과 다리에 번졌다. 창피함에 급히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어쩐지 서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장소를 옮겨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간 하나가 아픈 무릎을 쳐다보았다. 분명 붉은 색의 피가 바지 위로 배어나온 것 같은데 상처는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흐린 시야에 하나가 다시 눈을 비볐다. , 진짜.

 한쪽 바지를 걷고 쭈그리고 앉아 자세히 확인하려니 이미 피가 엉망으로 엉겨 붙은 무릎이 투둑,하고 다시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찬바람이 부딪혀 가뜩이나 따가운 무릎이 더욱 시렸다. 어쩐지 뺨도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에 서러워진 하나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내일은 병원에 가 봐야지. 하고 미룬 것이 몇 달째였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할 일은 쌓여 있었고 그것들을 제쳐둔 채 자신의 일부터 우선하는 것은 하나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슥슥 눈물을 훔친 하나가 일어나 다시 일터로 향했다. 요즘 안 그래도 새 프로젝트 때문에 바쁜데, 넘어진 것 때문에 여기에 멍청하게 주저앉을 순 없지. 엉망이 된 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하나는 아까보다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연구소 문을 연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다행히 아까보다 시야는 나아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호통 치는 소장님의 말씀에 하나의 코가 다시 시큰해졌다. 그 아무도 피가 배어나온 하나의 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봇/셈한] 너와 나의 오늘

 

 

 

세모야.”

.”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반.”

아침?”

.”

 

 조용히 병실 안을 정리하던 세모의 이가 아득하고 맞물렸다. 당장이라도 울컥하고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걸 참아낸 세모가 조심스럽게 하나의 침대 끝에 앉았다.

 

, 밥 온다.”

 

 요즘 들어 하나는 더욱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초침소리가 너무 거슬린다며 병실에 있는 시계도 뗀 것은 물론이고, 세모가 늘 차던 손목시계도 이제는 집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마 한쪽 감각을 잃어서겠지. 히스테리 수준으로 초침소리가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던 하나를 안고 세모는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오늘 밥은, 잘 모르겠다.”

두부조림인 것 같네.”

, 맞아.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지금 먹을래?”

 

 하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는 밖으로 나가 배식대에 꽂혀있는 식판을 들고 왔다. 하나는 이미 침대 앞으로 기어가 식탁을 펼치고 있었다. “배고팠어?” 세모가 묻자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밥이라도 잘 먹어야 빨리 낫지.” 그 말에 세모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급하게 입을 떼었다. 보이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모는 혹시, 하는 생각에. 그렇게 둘은 보이지 않는 희망의 끈을 겨우 겨우 붙잡고 있었다.

 

 하나가 맨 처음 연구소에서 쓰러진 날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세모였다. 회사에서 연락을 받은 세모는 모든 것을 그만둔 채 하나가 실려 간 병원으로 달려갔다. 해외에 살고 있는 두리와 지방으로 내려간 도운에게는 연락도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모가요, 세모는요,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던 그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예전에 물리적으로 크게 받은 충격이라던가, 그런 게 있었나요?”

…….”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하던 세모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있었어요.”

 

 하나는 입버릇처럼 아버지가 자신을 살렸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어렸을 때 벌어진 화재 사건에서 아버지는 아내 대신 자신과 두리를 선택했다고 했다. 설마 이게 이제 와서, 몇 십 년이 지나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세모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 불이 났다고 했어요.”

그래서요?”

꽤 큰 불인 것 같았어요.”

 

 그 뒤로도 한참 이어진 대화의 결론은 결국 원인 불명의 시력 저하라고 했다. 다들 할 말이 없으면 그렇게 말하지. 하나의 뇌나 망막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고 했다. “다행히 완전 실명은 아니고, 시력이 극도로 저하된 거라 안구 수축의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다행인가. 다행인가? 자신만이 좌절하고 있는 듯한 상황에 깊은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세모를 덮쳤다.

 

아마 빛이 들어오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세모는 당장이라도 의사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당신 아들이 그렇게 되더라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삼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가 세모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나아질 가능성이 있나요?”

글쎄요. 보고된 사례가 없어서 저희도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미건조한 의사의 목소리에 세모의 숨이 턱턱 막혔다. 입 안에 모래가 잔뜩 들어와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끝없는 구역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진단에 세모는 하나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 * *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그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하면 알맞을 것 같다. 먼지가 잔뜩 낀, 흠집이 난 렌즈를 24시간 내내 끼고 있는 느낌.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시야는 어지러웠고 실제로 이 상태가 된 지 몇 주간은 내내 토하기만 했었다. 차라리 눈앞이 깜깜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을 뜨면 다시 세상이 환하게 보일 것 같다. 예전에는 당연히 보였던 풍경들이 이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었는데. 이렇게 보이느니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세모의 얼굴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이어리에 엉망으로 적혀있는 글씨는 알아보는데 한참동안의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흐릿한 시야 탓에 몇몇 글자들은 겹쳐져 있었고, 때로는 위아래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 다이어리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잠이 든 하나의 얼굴을 차마 볼 수조차 없어 그대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쥔 채 세모는 그렇게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날아다니는 글씨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적힌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게도 너무 기뻐서 세모는 다이어리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겨우 다이어리를 닫은 세모가 떨리는 숨을 고르게 가다듬었다. 그리곤 하나의 침대 끝에 살며시 앉았다. 벽 쪽으로 돌아누운 탓에 하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불이라도 꺼줘야겠다 싶어 세모가 일어나려는 순간,

 

세모야.”

 

 하나의 목소리가 세모를 붙잡았다.

 

 이제까지 자고 있지 않았던 듯 하나의 목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차 싶은 세모가 그제야 목을 가다듬었다. 하나의 앞에서 울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들킨 것만 같아 세모는 속이 쓰렸다.

 

.”

울었어?”

아니.”

 

 말하는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어나가 이상한 음을 내었다. 그 소리에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울었네, .”

아니라고.”

 

 아닌데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야. 하나가 돌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했다. 웃는 하나와는 달리 세모는 진정되지 않는 목울대를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

 

누가 남의 다이어리 보래.”

 

 하나가 손을 뻗었다. 세모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은 손에 세모는 몸을 기울여 그 손끝에 자신의 얼굴을 대었다. “미안.” 가까스로 내뱉은 대답에 하나가 세모의 뺨을 문질렀다. 축축한 뺨에 하나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 진짜 울었어?”

세수했어.”

 

 자동반사 수준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하나도 세모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울지 마.”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장난스럽게 말한 하나의 말에 세모는 결국 엉엉 목 놓아 울고 말았다. ? 울지 말라니까? 울음기 하나 담기지 않은 하나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너무 담담하게 자신을 놀리는 하나가 너무 안쓰러워서.

 

다 울었냐?”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하는 하나를 앞에 두고 어린아이처럼 운 세모가 괜히 부끄럽고 창피해지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하고 온다.”

아까 했다면서?”

 

 일부러 발소리를 쿵쿵대며 화장실로 걸어간 세모가 세면대에 물을 잔뜩 받아놓고 얼굴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보다 더 힘들 하나를 앞에 두고 눈물이나 짜내다니. 밀려드는 죄책감에 세모가 고개를 들고 뺨을 팡팡 쳤다. 거울 속에 비친 세모의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입술까지 퉁퉁 부어 못생긴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의 눈이 안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건가. 허탈하게 웃은 세모가 거울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가 유일하게 또렷하게 쓴 자신의 이름이 떠올랐다. ‘세모의 얼굴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이어리의 마지막 구절이 세모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이렇게 울어서 못생겨진 얼굴은 다신 보이지 말아야지. 세모가 거울 속의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짐했다.

 

 

 

* * *

 

 

 

세모야, 여기서 사진 찍어 줘.”

 

 하나가 더듬거리며 어느 벽 옆에 섰다. 병원에서 퇴원한 하나는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딱 한 달간, 여행을 다닌 뒤에 다시 새로운 삶으로 돌아가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의연하고도 올곧은 하나의 목소리에 세모 역시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하나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잘 안 보이는 눈을 가지고, 하나는 모든 걸 사진에 담고 싶다고 말했고 세모는 기꺼이 하나의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눈이 보이게 되면 볼 거야. 눈이 보이게 되면 다시 보자. 등의 의미 없는 말들은 하지 않았다. 그저 둘은,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았고 다신 돌아오지 않는 오늘이라 생각하며 지냈다.

 

 한 달이 끝난 마지막 여행길에서 하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따라와 줘서 고마워.”

 

 덤덤한 감사임에도 불구하고 세모는 하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부러 더 활짝 웃었다.

 

나를 선택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기차 안에서 둘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서로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그 무엇보다 찬란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너와 나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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