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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공한] 유실물(遺失物) 본문

레트로봇

[또봇/공한] 유실물(遺失物)

승 :-) 2015. 12. 11. 11:54

 



 이별이라는 게 참 그렇다. 그만 만나자. 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해 관계가 두 동강 나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사실 그 한 마디로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감정을 우두둑 뜯어내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단지 이별이란, 그 말을 하면서 앞으로 나는 너를 내 인생에서 조금씩 지워버릴 거야.’ 라고 내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너를 아직 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 내가 먼저 이별을 선고했지만, 웃기게도, 나는 당장 네가 없는 하루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어둠이 무서워 방의 불을 끌 수조차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없는 어둠이 무서워서.

 

 

[또봇/공한] 유실물(遺失物)

 

 

 저녁 10, 네가 연구실에서 퇴근을 하며 나에게 전화를 할 시간이다. 나는 할 일을 대충 마치고 침대 위에 누워 네 전화를 기다리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네 이야기를 듣고, 푸념을 듣고, 위로도 해주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으로 충만해지곤 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차가워 보인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오해를 받았다는 투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웃음 지었다. 아닌데, 오공이 그렇게 사납게 생기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나보다. 하면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하나 너 밖에 없어.’ 라고 말하던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일 재밌는 때는 그런 때였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와, 내 앞에서의 독고오공이 너무나 달라 웃긴 상황이 연출될 때가 종종 있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나야, 보고 싶었어! 하고 애교를 부리던 네가 문소리가 들리고 그대로 딱딱한 목소리로 그럼 이따 전화할게. 하고 말할 때, 나는 깔깔대며 웃었고 곧 초코톡에는 당황스러워하는 네 메시지가 날아오곤 했다.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지. 네가 발표를 하던 세미나에 초청 받았던 날,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가 직접 쓴 논문을 발표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프레젠테이션을 넘겨가며 영어로 발표하던 그 모습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독고오공의 모습이다 싶어 하루 종일 두근거렸었는데.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며 나를 발견한 네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는데.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지금 이렇게 방 안에 혼자 누워 청승을 떨면서 온갖 추억을 회상하는 내가 이별을 고했다는 점이다. 점점 바빠지는 그의 일상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여서, 어떻게 보면 나는 엄청나게 이기적이었던 거지. 나는 계속해서 그가 나를 바라봐주길 바랬고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줄다리기가 일 년 쯤 지났을 때, 나는 드디어 간신히 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오공아. 연애는 식물을 키우는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식물에게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가듯이, 사랑을 주지 않으면 지쳐가잖아.’

 

 너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그 때부터 이미 조금씩 틀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달을 고민했다. 그만 만나자고 말하기까지. 5년을 만났으나 나는 단 한 달 만에 그에게 고백했다. 그만 하자. 숨이 턱턱 막히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커피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붙잡길 바랬는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멍해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릴 때, 네가 말했다.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동시에 나는 후회했다. 거대한 후회라는 파도가 삽시간에 밀려와 나를 덮쳤고 그 충격에 숨도 쉴 수 없어진 나는 고개를 툭 떨궜다. 그리고 우리 사이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 * *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가, 켰다가,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 뒀다가, 다시 제일 큰 벨소리로 설정해 뒀다가, 혹시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평소엔 켜지도 않았던 알람을 제일 큰 알림음으로 설정해 뒀다가, 번호를 차단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한 것이 한 시간 째였다. 밤 열한시가 훌쩍 지나고 시계는 이제 내일로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오늘에 붙잡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실제로 그것을 행하려고 휴대폰을 든 손을 머리께 까지 올렸다가, 혹시라도 올 네 연락 때문에 다시 내려놓았다. , 정말 병신 같다. 정말,

 

 정말 못해 먹겠다.

 

 차마 방 안의 불을 다 끌 수가 없어 스탠드의 불을 켜 놓았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모로 누워 맞대고 있는 베개에선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관자놀이가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대신 베개가 빠르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지도,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위에 있는 눈에서 아래에 있는 눈으로, 그리고 베개로 흘러 내려간, 마치 강물이 물줄기를 내듯, 눈물들이 속절없이 베갯잇을 적실뿐이었다.

 하아. 내쉬는 숨이 잔잔하게 떨렸다. 고요한 방안은 이내 눈물이 조금 잦아든 내가 훌쩍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으로 흐르던 눈물이 아래로 똑, 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눈물들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 싶었던 순간 나는 이것이 독고오공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편에서 마치 댐의 수문을 닫듯 비정상적으로 닫아버린 감정 샘이, 한참이 지나서야 막히고 막히다 못해 다른 쪽으로 터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쉴 새 없이 흘러내릴 리 없다. 젠장. 도대체 얼마나 막혀 있었던 거야. 헛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보고 싶어 할 거였으면 뭣 하러 헤어지자고 말했지. 계속 그렇게 눈물을 떨어트려대는 눈을 하고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덮쳐오는 허망함. 외로움. 그가 내 옆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 속에서 깊은 허무함이 끓어올라 부글부글 넘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 마냥, 너는 더 이상 내 옆에 없는데 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었던 건지 나는 서럽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무심하게 지나쳐 가는 밤.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홀연히 일어나 방 안을 비척비척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아예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할 생각이었다. 12시가 훌쩍 넘어 이제는 내일이 되어버린, 그 날 속에서 과거의 끈을 잘라내려 애쓰는 내가 있다. 이사 올 때 썼던 큰 상자를 꺼내 집 안에 있던 소품들을 하나하나 담기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를 잊을 수가 없어. 내 모든 것과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너를 지우기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독하게 괴로운 역설.


 그렇게 나는 너와의 기억을, 이제는 더 이상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유실물 같아진 너를 만나러 다른 기억들을 유실(遺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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