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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kiss, kiss, kiss!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kiss, kiss, kiss!

승 :-) 2016. 1. 3. 21:41

 

 

 빌어먹게도 더운 야구장이다. 분명 한창 더운 시간은 지난 지 오래인데, 2-3. 아슬아슬한 스코어와 등장한 4번 타자에 경기장은 들끓었다. 나는 보통 인도어형 인간이라, 야구도 늘 집에서 중계로 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니까, 선배한테 끌려온 것이다. 야구는 직관이 제 맛이라며, 나를 나름대로 가장 좋은 자리에 앉혀 두었는데 TV보다 먼 타석에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까앙-! 4번 타자의 야구 배트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크게 날아갔고, 동시에 2,3루에 나가 있던 주자들이 차례차례 홈 베이스를 밟았다. 관중석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에 가득 휩싸였다. 야구장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때는 여러 상황이 있다. 타자가 안타를 쳤을 때, 그리고 그 타자가 타점을 올렸을 때, 지금처럼 역전을 했을 때, 그리고,

 

 키스타임.

 

 

 

[또봇/셈한] kiss, kiss, kiss!

 

 

 

 

 그러니까, 집에 와서도 잊히지 못한 그 장면은 5회가 끝나고 일어났다. 보통 5회는 클리어 타임으로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쉬는 시간이 긴 편이다. 마운드가 정리되는 그 시간 동안 선수들은 수분 보충을 하거나 작전회의를 하곤 한다. 또한 야구장의 꽃이라 불릴 수 있는-혹자에겐 분명 염장으로 느껴질 수 있는-키스타임이 나타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키스타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애인이 있었을 땐 몇 번 찾아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단지 직관에서나 볼 수 있는 선수들의 쉬는 시간이 궁금해 열심히 벤치에 눈길을 두었다. 현재 경기하는 두 팀 중 내가 응원하는 팀은 또일럿 나인즈. 지능형 포수를 중심으로 변화구 타입의 투수와 어깨가 강한 외야수를 둔 팀이었다. 다른 팀들과 달리 유난히 돋보이는 유대감이 팀을 상위권으로 이끄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팀이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벤치를 열심히 목을 빼고 들여다보자, 무거운 장비를 풀고 쉬는 차하나, 팔꿈치에 아이싱을 하고 있는 독고오공, 수분 섭취를 하고 있는 권세모와 몸 풀기를 쉬지 않는 차두리가 보였다. 권세모는 마침 역전타를 치고 난 직후라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TV에는 잡히지 않았던 선수들의 일상 아닌 일상의 모습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나는 정신없이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아까의 역전타보다 훨씬 우렁차고 엄청난 환호성이 경기장을 흔들었다. 심지어 옆자리에 앉아있던 선배조차도 나를 흔들며 전광판을 가리켰다. 갑작스럽게 골을 울린 큰 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게 우선이었으나 나는 일단 선배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곳엔

 

 차하나와 권세모가 있었다.

 

 카메라 감독이 장난스럽게 두 사람을 지목한 것 같았다. 보통 키스타임 때 카메라에 잘 잡히려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열심히 애정행각을 벌여야 하며, 마운드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고 따져보니 충족시키지 못할 조건들은 없었다. 애정행각을 했던가? 그걸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들짝 놀란 나는 그제야 사태파악을 마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선배!!”

. 대박이다. 이건 정말 대박이야. 정말 할까?”

 

 전광판에 비친 어두운 벤치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발랄하고 형광빛인 kiss time이라는 유치한 글씨가 돋보였다. 그 안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차하나와 웃음기가 싹 가신 권세모가 보였다. 어쩌지, 난처하겠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라운드 위에서 보이는 권세모와 차하나는 절대 장난을 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팀 내에서 가장 진지하다고 해야 할까, 저 사람들도 장난을 치긴 칠까? 싶을 정도인 사람들이었다.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차하나는 그나마 나았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팀원들이 잘 해주어서 이긴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라도 하지, 권세모는 권세모 선수! 오늘 경기에 대해 한 마디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기자들이 물어보면, “차하나한테 물어보세요.” 하고 급하게 자리를 뜨기 일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에 인터뷰 내용을 생각해보니,

 

차하나가 잘 해줬죠.”

포수가 고생한 경기였습니다.”

포수에게 맞은 빈볼이 유감이었습니다.”

 

 주제는 전부 하나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흐렸던 초점을 다시 벤치로 모았다. 권세모는 아예 스파이크를 툭툭 털고 벤치 밖으로 나와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권세모가 차하나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밖으로 나오라는 뜻이었고 차하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윽고,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

--!”

 

 그 소리에 차하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졌고 주변 팀원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아니, 정말 할 생각이란 말이야, 권세모는? 하고 권세모를 바라보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얼굴을 한 그가 차하나에게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하도 표정이 없고 무뚝뚝해서 로봇이 아닌가 하는 루머까지 있었던 권세모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씨익 능글맞게 웃으며 차하나에게로 다가가는 권세모의 얼굴이 전광판으로 확대되어 경기장 전체에 송출되고 있었다.

 

 권세모가 차하나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경기장의 함성소리는 더욱 고주파가 되었고 데시벨이 올라갔다. 귀가 먹먹할 정도라 나는 눈은 돌리지 않은 채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권세모는 거의 포기한 듯한 차하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살짝 돌린 채, 그러니까, 아주 소중한 것에 입을 맞추듯이 쪼옥 하고,

 

 키스타임에,

 

 권세모가 차하나에게,

 

 키스를.

 

 

 이제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을 정도로 큰 함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이 빠져 있었다. 뭐지? 지금 남자와 남자가 입을 맞춘 건 차치하더라도, 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현을 가득 담은 제스쳐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하하. 대단한데요, 권세모 선수!”

야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센스가 대단합니다!”

 

 이제 됐냐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한 권세모의 얼굴이 전광판에 가득 담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잘생겨 보일 수가 없었다. 카메라는 권세모와 차하나가 잡힌 이후로 아예 다른 카메라로 바뀌어 또일럿 나인즈의 벤치를 찍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잘 안 찍힌 것 같은데. 다시 찍을까? 라고 말하는 권세모의 모습과, 야 이 미친놈아! 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쥐어 잡은 차하나의 모습을. 전광판에 비친 차하나의 얼굴은 분명 붉은빛의 램프를 키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그 일은 완전한 이슈가 되어 인터넷과 스포츠 뉴스를 달구었다. 특히 경기를 끝내고 한 권세모의 인터뷰가 아주 걸작이었다.

 

권세모 선수, 오늘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하셨는데요.”

, . , 차하나. 어디 가냐? 도망갔네. 잘 먹겠습니다.”

 

 V* 음식점의 무료 이용권 티켓을 살랑살랑 흔들며 권세모는 카메라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잘 먹겠다고. 너무나 쿨한 그의 표정과 말투에 나는 분명한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그 날 직관을 보러 간 내가 장담하건대, 둘은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때의 그 일련의 부드러운 행동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읽은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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