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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미하] 사랑을 전하세요! 본문

오오후리

[하루미하] 사랑을 전하세요!

승 :-) 2017. 2. 11. 23:16

 바람이 차다. 잠깐이라도 추위를 피할 겸 들어온 마트는 한창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라 점원들의 말소리로 북적였다. 딱히 살 것도 없었기에 카트도, 바구니도 들지 않은 채 마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멈춘 것은, 할인 상품을 적어 놓은 전단지를 눈으로 쓰윽 훑다가 지나간 한 코너에서, 들려온,

 

 

 

 

[하루미하] 사랑을 전하세요!

 

 

 

 

 색색깔의 포장지에 잔뜩 감긴 무언가를 내민 것은 A반의 한 여자아이였다. 이게 뭐야? 라고 묻기도 전에 주변에선 환호성이 빗발쳤다.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의 상자를 받아들자 여자아이의 빨간 뺨이 이제는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게 뭐야?”

 

 아이는 말이 없었다. 나는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곧 끝나가는 점심시간을 이런 식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를 긁적이곤 잠시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넌 그것도 모르냐? 오늘 발렌타인데이잖아!”

 

 누군가가 툭 던진 말에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졌다가 돌아왔다. , 발렌타인데이. 그거, 초콜릿 주는 날. “이거 초콜릿이냐?” 내가 묻자 앞에 서 있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환호성이 복도를 휘감았다.

 

너나 먹어.”

 

 한 발짝 다가가 그의 손에 상자를 쥐어주자 어디에선가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김샜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알 게 뭐람. 나는 그저 인파들을 헤치고 교실로 돌아왔다. 이런 날 받는 초콜릿은 이상하게도 짜증스러웠다.

 쉬는 시간마다 나를 잘 모르는 아이들까지 찾아와 교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쟤가 J 고백 거절했다며? 쟤 여자친구 있어? 대단하네, 하루나 모토키~ 역시 야구부는 달라. 웅성거리고 있지만 정확하게 나를 향한 대화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

 

 너 나 알아? 한 마디에 그들은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책상 안도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어 책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런 귀찮은 기념일은 왜 있는 거지. 이상하게 치밀어 오르는 못마땅함에 나는 책상 안에 있는 초콜릿과 사탕들을 전부 꺼낸 뒤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 * *

 

 

 

 그럴 때도 있었지. 행복한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으로 사랑을 전하세요! 점원의 목소리에 문득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그 여자아이는 나에게 사랑을 전하려고 그 커다란 상자에 정성스레 포장까지 해서 초콜릿을 준걸까. 이제 와서 드는 미안함에 나는 그 가판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때는 몰랐다. 워낙 어렸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경험을 해보았으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껴본 적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부담스러워서, 귀찮아서, 라는 명목으로 나는 그들의 성의를 무시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나는 홀린 듯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 금박에 하나하나 싸인 제법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이었다.

 

초콜릿을 좋아하던가?’

 

 고개를 살짝 돌리니 엄청나게 커다란 판초콜릿이 보였다.

 

별로 안 예쁜데.’

 

 가장 괜찮고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을 고르느라 시간이 한참 지난지도 몰랐다. 내가 고른 초콜릿은 녹차맛 생초콜릿이었다. 그나마 포장이 가장 고급스러워보였고, 일반 초콜릿과는 다른 맛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을 맞아 그다지 할인율이 적용되지도 않은, 그것도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 초콜릿을 샀다는 사실은 마트를 나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초콜릿을 사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했다는 것도.

 

 왜 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구를 줘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메일 주소를 눌렀다.

 

-뭐해?

 

 답장이 없더라도 어차피 슬슬 그쪽으로 갈 참이었다. 배가 조금 고팠고 손가락이 찢어질 듯 찬바람이 불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쩌면 몇 년 전의 그 여자아이도 나에게 초콜릿을 주기 전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다면 꽤 미안한데. 착잡한 마음에 입이 조금 썼다.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동네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집에 있어요. 답장 늦어서 죄송해요. 택시에서 내리기 5분 전쯤 도착한 메시지는 두 통이 연달아 와있었다. 그의 성격과 꼭 닮은 문자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와.

 

 집 앞에서 문자를 보낸 지 5분도 안되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렌이 달려 나왔다.

 

,! ,어쩐일로

 

 집에서 입는 얇은 평상복 차림의 그가 추워보였다. 나는 급한 대로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그에게 매어주었다.

 

이거.”

 

 나는 아까 전에 마트에서 산 초콜릿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더라고.”

 

 그 말에 렌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큰 눈동자가 양 옆으로 빠르게 돌아다녔다. 분명 자기는 산 게 없는데 어떻게 하냐며 울먹일 것이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한 손으로는 내 옷깃을 잡고 한 손으로는 내가 준 초콜릿을 꼭 쥔 채 렌은 울먹였다. 나는 입고 있던 패딩 지퍼를 열고 차갑게 언 그의 몸을 감쌌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렌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아. 나도 보이는 김에 사온 거니까.”

 

 렌이 패딩 안에서 꾸물거리며 양쪽 손으로 내 허리를 감쌌다. 혹시 내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보석을 렌에게 줬다고 해도, 이런 반응이라면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에게 그것을 주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하물며 마트에서 산 초콜릿이야. 몇 년 전의 버려진 초콜릿들을 잊으며 나는 조금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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