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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쥰타미하] 그 봄날의 신입생 본문

오오후리

[쥰타미하] 그 봄날의 신입생

승 :-) 2015. 1. 22. 16:23

[쥰타미하] 그 봄날의 신입생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한 번 눈에 띄면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끄는 꽃이 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렇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누군가의 시선을 계속 잡아끄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이 강의실에 있었다.

쥰타는 아까부터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는 눈동자를 책망하고 있었다. 뭐야, 또 왜 이래. 왜 이러는 건데. 하면서도 또 흘깃, 하고 눈동자는 얄궂게 돌아갔다. 그게, 복학하고 나서 처음 들은 수업에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쥰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미하시 렌이라는 신입생이었다. 귀엽게 생겼네. 쥰타는 그렇게 말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입안에 신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위험하다. 저 친구는 위험해. '쟤 왜 말을 저렇게 더듬어?' 동기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분명히 이번에도 그럴 테지. 늘 그랬듯이 저 이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몇 백 명의 학생들 사이에 묻혀버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쥰타가 꽂힌 상대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오직 쥰타만은 수면 아래도 그 상대를 만나러 헤엄쳐갔었다.

 

재밌는 것은 쥰타가 흥미를 느끼는 상대가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쥰타는 이렇게 구미가 당기는 상대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피식 웃곤 했다. 젠장, 수술이랑 수술이 만나서 뭐 어쩌잔거야. 존나 비생산적.

그러나 돌아가는 눈동자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젠 아예 대담하게 그의 목덜미를 훑어내리기 까지 했다. 이미 그가 앞에 나와 그 더듬거리는자기소개를 마쳤을 때 쥰타의 시선도 스캔을 마쳤었지만, 쥰타는 여전히 그 청년을 시선 안에 가두고 있었다. , 청년이라기 보단 소년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청년이라기에 그는 너무나도 여리고 호리호리했으니.

 

쥰타는 이 자기주장 심한 눈동자의 움직임이 가지는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성도 고스란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쥰타는 애써 그 시선을 털어냈다. 어차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테니, 주변에서 지켜만 보지 뭐. 늘 그랬듯이 쥰타는 그 '수술' 을 먼발치에서 관음 하기로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티를 내는 순간 이 세계에서 쥰타의 인생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생각하고 쥰타는 어깨를 떨었다. 재수 없는 기억.

 

복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간 학교여서 그런지 술자리 약속도 많았다. 1, 2차 술자리가 끝나면 으레 여학생들은 집에 가고, 몇몇의 술 먹기 좋아하는 남자들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그 곳에서 나오는 말들은 거의 다 비슷했다. 술 취한 수컷들의 음담패설. 그런 주제에 흥미가 없던 쥰타는 취기가 올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총 몇 병 마셨더라, 한 세 병은 마셨나보다. 쥰타는 울렁거리는 속에 더 이상 술은 마시지 못하고 물만 들이켰다.

 

, 오늘 그 1차에서 뻗어서 간 신입생 존나 귀엽지 않냐?”

 

1차에서 뻗어서 간 신입생이 한 둘이어야지. 그 중에서 어떻게든 1학년들에게 작업을 걸어보겠답시고 취한 신입생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택시를 태워 보내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마냥 우쭐해하고 있는 인간들이 쥰타는 그저 유치해보였다. 생각해보니 오늘 미하시도 술자리에 왔었다. 근처에 앉으면 취해서 실수할까봐 일부러 멀리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미하시는 정확히 소주 세 잔을 받아 마시고는 그대로 쓰러졌었다. 쥰타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미 여러 명이 미하시를 부축해 나간 뒤였다. 어딘가 씁쓸함을 느낀 쥰타는 앉아서 소주 두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보통 남자애들도 부축해주나? 쥰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 세잔 먹고 간 애?”

 

. 난 걔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게이 새끼도 아닌데 존나 이상해.”

 

맞아. 눈 꼭 감고 받아 마시는데 솔직히 좀 병신 같긴 한데 꼴리더라.”

 

미하시였던가? 남자만 아니었어도 한 번 해 보는 건데.”

 

그 새끼 근데 남자 맞냐? 한 번 확인해 봐야 돼 진짜.”

 

미친놈아! 하면서 낄낄거리는 목소리들 속에서 쥰타는 분명히 들었다. 음담패설의 난무 속에서 들리는 이름 세 글자.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너는 그냥 조용히 묻혔어야 하는 거잖아. 쥰타는 순식간에 의식이 바닥으로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왁자지껄한 술집 속에서 쥰타는 조용히 이를 뿌드득 갈았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이 더러운 기분은. 쥰타는 곧바로 피식 웃었다. 쥰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이제껏 억눌러져 왔던 감정 하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남몰래 해왔던 행동과 상상들과 지금 눈앞에 있는 술 취한 남자들이 내뱉는 말들을 빠르게 오버랩 시켰다. 사실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니네가 그러는 건 기분이 더러워.

 

씨발. 술 맛 떨어지는 소리 하고 있어. 난 이제 간다.”

 

저 새끼 군대 갔다 오더니 몸 사리는 거 봐.”

 

옷을 주섬주섬 챙긴 쥰타는 그대로 술집을 나와 버렸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순식간에 폐에 들어찼다. 갑자기 바뀐 온도에 속이 뒤집혀 쥰타는 술집 옆 골목으로 들어가 그 간 먹어낸 것들을 쏟아냈다. 얼얼하게 아픈 목구멍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눈물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순식간에 속이 비어 헛헛해진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쥰타는 코트 앞섬을 조금 더 단단히 여몄다.

 

쥰타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와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본가에서 다니는 것 보다야 훨씬 나았다. 학교 정문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유흥가에서는 걸어서 5분 거리. 5분을 걸으며 쥰타는 술 취한 대학가의 풍경을 훑어보았다. 개강 첫날부터 잘하는 짓들이다. 술집들은 새벽 3시가 지난 지금까지도 환히 영업을 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젊은이들은 술잔을 맞부딪히며 마치 자신이 대단한 주당인 양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또 다시 치미는 구역질에 쥰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택가는 그나마 한산했다. 이래야 새벽 같지. 쥰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때였다.

 

, , 선배님!”

 

쥰타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곤 쥰타는 다시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미하시였다. 마치 큰 결심을 하고 쥰타를 부른 듯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쥰타가 멍하니 있자 미하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쥰타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쥰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섬을 쳐다보았다. 코트에 가려진 채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쥰타는 본격적으로 미하시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단 둘이 마주보고 있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이 상황 때문에 그런 건지 몰라도 쥰타의 심장은 귀에서 뛰는 것 마냥 쿵쾅거리는 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댔다.

 

미하시는 우물쭈물 하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곤 빠르게 쥰타를 지나쳐갔다.

 

이 근처 사니?”

 

빠르게 지나쳐 가는 쥰타의 목소리에 미하시는 멈춰 섰다. 몸을 반쯤 돌린 채 미하시를 흘깃 쳐다보는 쥰타가 그렇게 물었다. 미하시는 몸을 홱 돌려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 ,기 빌라. 쥰타는 싱긋 웃었다. 살아요. 조그맣게 덧붙이는 경어에 쥰타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미하시는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붙인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쥰타는 다시 취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가보라는 듯 손을 까딱거린 쥰타가 미하시에게 말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미하시가 ,! 하고 온몸으로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한 뒤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쥰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밟았다.

 

 

* * *

 

 

오늘 시간 되니? -타카세 쥰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고 미하시는 핸드폰을 꺼냈다. , 타카세 선배! 미하시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답장을 했다. . 오늘 시간 됩니다. 미하시는 이모티콘을 붙일까 말까 한참동안 고민한 뒤 전송버튼을 눌렀다. 한 달 전에 스쳐지나가듯 했던 말을 선배는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예의 상 하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미하시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하시에게 쥰타는 멋진 선배였다. 발표수업 때도 교수님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잘 했고, 과 사람들과도 잘 지냈다. 유쾌하거나 위트가 있는 선배는 아니었지만, 그저 그 존재 자체로 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 닮고 싶은 선배였다. 그런 선배와 옆집에 사는 것도 신기한데, 오늘은 식사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미하시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근데 내가 오늘 조별 과제 모임이 있어서, 8시쯤 끝날 것 같아. 간단하게 뭐 먹고 있어.

 

미하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보내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쥰타는 핸드폰을 보곤 침대에 누웠다. 사실 조별 모임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말은 단지 쥰타가 짜놓은 어떤 그물의 일부일 뿐이었다. 쥰타는 휘파람을 불며 시계를 보았다. 한 세 시간 남았네. 쥰타는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미하시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미하시를 만나기로 멋대로 정해놓고 꾸미는데 기력을 다 허비한 나머지 정작 약속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졸려온 쥰타는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히 자세를 잡은 뒤 잠들었다.

알람이 울리고 쥰타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 이제 가야겠다. 중얼거린 쥰타가 기지개를 펴고 머리를 정리한 뒤 옷을 꺼내 입었다. 제일 아끼는 옷을 꺼내 입은 쥰타는 답지 않게 향수까지 뿌렸다. 자신도 왜 이러는 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누군갈 만나는데 이렇게 신경을 쓴 적은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라는 것이다.

 

쥰타는 미하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미하시를 집 앞에서 만난 이후로 둘은 종종 마주쳤다. 그 때 쥰타가 미하시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이었다.

 

여보세요. 미하시. 오고 있니?”

-여보, ! 네 오고 있어요!

 

어딘지나 알고 오고 있다는 걸까. 쥰타는 피식 웃었다. 그럼 학교 앞 H에서 보자. 하고 전화를 끊은 쥰타는 몸이 벌써부터 달아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쥰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딸랑, 소리가 들리고 왁자한 학기 초의 대학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어김없이 쥰타의 시선을 빼앗는 그. 미하시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쥰타는 미하시 앞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미하시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꾸벅했다.

 

! 녕하,세요.”

 

크게 인사하려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핀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된 미하시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쥰타를 쳐다보았다. 쥰타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가방이라도 하나 가져올 걸. 쥰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앉으라는 손짓을 한 쥰타가 저녁은 먹었어? 하고 물어보자 미하시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네! ,,하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쥰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았다. 이대로 술을 마시면 분명히 소주 한 병도 못 마신 채 실수를 할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상황도 쥰타의 계산 안에 들어있던 것이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학교생활은 어때?”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꺼내며 쥰타가 소주 두 병을 시켰다. 헤엑! 하고 놀라는 미하시를 보며 쥰타는 싱긋 웃었다.

미하시는 쥰타가 따라주는 술을 잘 받아마셨다. 천천히 마셔, 라고 예의상 말 했지만 어느 새 둘은 한 병을 다 나눠 마시고 말았다. 쥰타는 취기가 빨리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 외로 미하시는 멀쩡해 보였다.

 

그 뒤로 약 한 시간 넘게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미하시는 쥰타의 말이 전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열심히 들었다. 쥰타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군대 이야기, 학생회 이야기 등등 미하시가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미하시는 마냥 이 시간이 즐거웠다. ,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것 빼고는. 미하시는 슬슬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앞을 보니 타카세 선배도 얼굴이 빨개진 것이 조금 취하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먹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잔을 들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짠 할까? 그것이 미하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미하시가 눈을 떴을 땐 몸이 제 멋대로 걷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땅이 막 움직이네, 신기하다. 미하시는 헤헤 웃었다. 힘도 안 들이고 집에 가다니, 술은 참 좋은 거야. 미하시는 다리를 버둥거렸다. 마치 허공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집 앞에 도착하고 미하시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미하시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삐삐삐, 하고 문이 열려버린 것이다. 술을 마시면 생각만 해도 다 이루어지나 보다! 미하시는 까르륵 웃었다. 웃는 것은 미하시의 술버릇이기도 했다.

 

미하시는 침대에 누웠다. 숨을 뱉을 때마다 뜨거운 김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뜨거워, 옷 갈아입고 싶다. 미하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겉옷이 벗겨졌다. 이윽고 니트도 벗겨졌다. 미하시는 가만히 눈을 꼭 감았다. 타카세 선배는 참 좋은 사람이야. 미하시는 오늘 일을 회상했다.

 

그러나 곧 차가운 손가락이 미하시의 목덜미에 닿았다. 미하시는 순식간에 파르르 눈을 떴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어두운 집 안에서 눈앞에는 어떤 남자가 미하시의 셔츠를 풀고 있었다. 미하시는 그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누구세요?”

 

미하시는 바들바들 떨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나는 것인지 자신에게서 나는 것인지 모를 술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미하시는 무서웠다.

 

미하시.”

 

타카세 선배의 목소리였다. 미하시는 순간 안심했다. 타카세 선배였구나.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러나 어깨에 닿아 오는 말캉한 촉감과 그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김에 미하시는 다시 몸이 굳었다.

 

, , , 선배, , 하시는

 

미하시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집에 오는 내내 땅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문이 저절로 열린다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로 미하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미하시 대신 움직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비밀번호는? 미하시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선배, ,비밀, 저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쥰타는 토끼눈이 된 미하시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술을 좀 덜 먹였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쥰타는 길고 얇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 하자 미하시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쥰타는 이제 정말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제 앞에 병아리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는 소년을 보며 쥰타는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쥰타도 조금은 취해있었다.

 

이제 미하시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선배, 자취방, , 단 둘, 나체, 묘한 분위기. 하지만 남자. 이 모든 상황이 미하시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쥰타는 미하시가 울먹이기 시작하자 맘 한 구석에서 슬슬 몸을 움직이는 어떤 감정에 무겁게 짓눌릴 것만 같았다. 쥰타는 잊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이 새하얗게 질린 새내기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고 피를 돌게 하고 싶었다. 한 입 한 입 베어 물어 뜯고 싶었다. 내가 너네 집 비밀번호도 모르는 데 술 먹자고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 순간 어떤 무거운 기억이 쥰타의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쥰타는 하고 있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을 지배한 기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안 돼. 쥰타는 재빠르게 말했다.

 

비밀번호는 네가 술 먹고 말하더라.”

 

미하시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그랬었나? 미하시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집안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은 마치 칼로 잘린 듯 없어져있었다.

이윽고 쥰타는 미하시를 눕혔다. 그리곤 이불을 덮어주었다. 미하시의 얼굴에 다시 물음표가 잔뜩 붙었다. 쥰타는 미하시의 위에 놓인 이불을 톡톡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술 많이 취했길래 데려다 준거야. 감기 조심하고. 가볼게. 쥰타가 말했고 미하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타카세 선배. 미하시가 덜덜 떨며 말했고 쥰타는 아니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깊숙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에 입이 썼다.

 

조금, 조금만 더. 쥰타는 미하시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쥰타는 이를 악물었다. 네 말대로 했잖아. 쥰타의 마음속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키던 그것은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몸을 접어 넣고 있었다. 쥰타는 밤공기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집 앞에 주저앉았다. 잘한 일이야. 잘한 일. 쥰타는 중얼거렸다. 진동이 울리고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타카세 선배, 오늘은 어말 죄송합니다.ㅠㅠ 제가 멋대로 추해서 선배한테 실수 한 것 같아요. 정말 죄공합니다ㅠㅠ

 

쥰타는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그럼 나중에 네가 밥 사.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은 쥰타가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이걸로. 주머니에서 답장이 온 듯 진동이 울렸지만 쥰타는 확인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4월의 밤공기는 아직도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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