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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회색으로 가득 찬 그 골목길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회색으로 가득 찬 그 골목길

승 :-) 2015. 3. 27. 23:25



[또봇/셈한] 회색으로 가득 찬 그 골목길

 

 

 

1.

 

 너도 어쩔 수 없는 겁쟁이였구나. 차하나가 중얼거렸다. 손에 쥐어진 종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고 찢겨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그저 종잇조각 정도로 변해버린 그것이 차하나의 손 안에 있었다. 그는 그저 웃었다. 조소가 가득 담긴 그 표정이 어느 순간 크게 구겨지더니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권 리모 씨의 장남 권 세모

김 성근 씨의 차녀 김 연화

 

 …인연을 맺어, 결혼, 축하, 차하나의 기분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단지 그래서 그랬다. 차하나는 도저히 그 단어들의 연속을 볼 수가 없었다. 차하나는 단어들이 의미를 이루지 못하도록 그것을 조각냈다. , ,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찢듯 날카롭게 들렸다. 귓가를 찌르는 소리가 텅 빈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오직 그 뿐이었다. 그의 방엔 오로지 그와 청첩장뿐이었다.

 손에 가득 담긴 종잇조각을 차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그대로 떨어트렸다. 종이들이 나풀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유리가 산산조각 난 듯한 그 모양새에 차하나는 또 다시 웃었다. 너희가 이렇게 됐어야 했는데. 그리곤 다시 기억해냈다. 문득문득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미는 기억에 차하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목소리가 죄 쉬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차하나가 지금 이 청첩장을 받기 전 날이었다.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권세모와 차하나였다. 둘은 여느 커플들과 다름없이 사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서로가 편해진 탓인지 싸우는 날이 잦았고, 결국은 우린 안 맞는 것 같아. 하는 상투적인 멘트들을 주고받으며 이별했다. 그렇게 오래 붙어먹었고 사랑을 속삭였음에도 그랬다. ‘우린 안 맞는 것 같아.’ 그 말 한 마디로 둘은 5년간의 관계를 쉽게 단정 지었다. 권세모, 그리고 차하나 둘 모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적어도 정말 그랬기 때문에 헤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오래됐으니까. 헤어질 때도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권세모가 뒤통수를 친 건 바로 어제였다. ‘우리가 헤어진 건 약 한 달 전이었다. 둘 다 파리해진 얼굴로 카페에 마주앉았고 차하나는 그 광경에 가슴아파했다. 너도 결국은 힘들어했구나. 나만 힘들어한 게 아니었구나. 슬픈 와중에 안심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도 잠시, 차하나는 권세모가 내민 봉투에 주목했다. 이게 뭐야? 묻자 권세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종이를 봤을 때 차하나는 일어나 나가버렸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봉투를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차하나를 보며 권세모는 입술을 달싹였다. 잔뜩 마른 입술을 아메리카노로 적시던 권세모가 그대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와도 돼. 그거 전해주려고 만나자고 했어. 그가 마른 나뭇조각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차하나는 바보 같게도 그 목소리를 듣고 권세모가 잠깐이나마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차마 카페에선 그것을 열어볼 자신이 없어 차하나는 집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고, 곧이어 그것은 공기 중에 물결치다 바닥으로 고꾸라져버렸다. 하하. 처음에 차하나는 정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웃었다. 하하. 하하. 하하하. 한 음절 음절을 끊어가며 그렇게 웃었다. 목숨을 끊듯, 숨을 끊듯 그렇게 웃었다.

 청첩장이었다. 그것은, 권세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청첩장. 차하나는 그 종이가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닫자마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싸해지며 몸이 으슬으슬 추워왔다. 귀에선 끊임없이 이명이 들렸고 그것이 괴로워 차하나는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방 안에는 그의 비명소리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명을 지른 후에야 겨우 이명이 멈췄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랑 몸을 섞고, 내 몸을 훑었던, 나와 체온을 나눴던 그의 몸이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하고,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하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방 안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어느 새 해가 져 방안이 컴컴해지고 이내 한치 앞도 안 보이게 되었다. 차하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이 뻑뻑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눈이 건조해 뻐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은 눈을 감으나 뜨나 마찬가지였다. 권세모가 없는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으나 뜨나, 마찬가지로 어둠의 세상. 자신을 집어 삼키려는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 차하나는 그것이 두려워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을 몰아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마치 태양 같은 존재였던 권세모.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의 태양이 아닌 다른 이의 태양이 되었다. 차하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밤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1.

 

 그들은 적어도 행복했다. 5년 간, 비록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지는 못해도,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걷거나 애정표현은 할 수 없어도 그들 나름대로 남부럽지 않게 사랑했고 실제로 행복했다. 집도 가까워 자주 왕래할 수 있었고 가족들도 매우 친해 여행을 갈 때나 무슨 행사가 있으면 늘 함께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이었고 동시에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서로의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위로하고 살아냈다. 그렇게 힘겹게 세상의 시선을 버텨내고 이겨냈다.

 차하나는 권세모의 눈빛을 가장 좋아했다. 자신을 바라볼 때 그의 표정은, 눈망울은 마치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송이를 바라보는 표정과도 같았다. 항상 진심으로, 진정성 있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주던 권세모였고 그래서 차하나는 단 한 번도 그의 사랑을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무섭게 다투다가도 권세모의 눈빛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감정들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차하나는 권세모를 좋아했다.

 권세모는 차하나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차하나가 권세모에게 너는 내가 왜 좋아?” 라고 물어보면 권세모는 늘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냥이 뭐냐. 엄청 성의 없어 보이네. 라고 툴툴대면 권세모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너라서 다 좋은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차하나는 녹았고 권세모는 웃었다. 그냥, 그냥. 차하나는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냥, 너라서, , 좋은 거야. 권세모의 말은 진심이었고 차하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야.”

 

 차하나는 권세모가 자신을 부를 때 나는 특유의 동글동글한 콧소리를 좋아했다. 자신의 이름은 유독 권세모가 부를 때에만 그렇게 간질간질한 느낌을 주었다. 하나야, 자신이 말했을 때와는 달랐다. 차하나는 가끔 기분이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는 권세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권세모는 부드럽게 물어왔다. 하나야, 무슨 일 있어? 차하나는 그렇게 권세모의 말 한마디에 위로받았고 웃음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권세모가 불러준 자신의 이름에 차하나는 그에게로 가 꽃이 되었다.

 날씨가 비가 올 듯 말 듯 불안정한 날이었다. 하늘이 잔뜩 습기를 머금고 뿜어대는 탓에 가만히 있어도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기분 나빠. 차하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애꿎은 옷을 탁탁 털었다. 그러다 옆에 있던 종이에 손을 베었고 손을 베인 자리에선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올라왔다. , 따가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빨았다. 상처가 났을 땐,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부위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차하나가 다쳤을 때 하는 당연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바로 권세모. 평소 같았다면 차하나의 입에 물려진 손가락을 빼내고 자주 다치는 차하나를 위해 가지고 다녔던 조그만 구급상자를 꺼내 소독약을 발라주고 약까지 발라줬을 것인데, 그 날은 아니었다. 권세모는 그저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연스럽던 흐름에 어딘가 어긋났다는 것을 느낀 차하나가 어색한 기류에 고개를 들어 권세모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가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그 때 차하나는 직감했다.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산산조각.

 


 

2.

 

 구역질이 날 정도로 힘든 기억들이 차하나의 머릿속에서 마구 뛰어다녔다. 쿵쾅대며 울려대는 머리에 차하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제부터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터질 듯 아파왔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려던 그가 의식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여 땅만을 바라보았다. 분명 볼만한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실핏줄이 터진 눈, 잔뜩 핏대가 선 목,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모든 게 엉망이었고 거울조차도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차하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차가운 물에 자신의 얼굴을 적셨다.

 만 하루 만에 차하나의 얼굴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소한 느낌이 닿았고 이제까지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는 듯한 기분에 차하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차하나는 집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일단은 바깥공기를 쐬고 싶었다. 아직도 머리는 무거웠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지만 그런 차하나의 몸 상태에 조용하고 어두운 이 집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날이 밝자 방 안에 잠들어있던 권세모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본 차하나는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아무렇게나 옷을 걸쳐 입은 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그러나 본능적으로 권세모와 함께했던 거리에는 발걸음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차하나는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 밖에서부터 너와의 기억이 한 가득이라, 걸을 때마다 그 감각이, 그 광경이 전부 다 너여서, 차하나는 그렇게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뒷목이 오싹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처음으로 차하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소리를 질러 목이 다 쉬었을망정 울지는 않았던 차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 동글동글한 콧소리를 담아 사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지금 자신의 주변에서 울리고 있었다.

 마치 공기 전체가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아 차하나는 숨을 쉬고 싶지 않아졌다. 단지 그의 목소리 하나뿐이었다면 숨을 들이마셨겠지만, 그가 아니라, 그 옆에서 울리는 또 하나의 목소리 때문에 차하나는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목소리들이 가까워져올수록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머리가 어지러워왔다. 목소리는 두 개였다. 차하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기절할 것만 같아 차하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턱하고 막힌 숨에 그는 당황했다.

 그리고 권세모도 당황했다. 차하나가 자신의 집 앞에 주저앉아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걸어갔다. 차하나의 앞을 지나쳐갔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어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권세모는 그랬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그렇게 그는 차하나를 스쳐지나갔다.

 권세모는 웃고 있었다. 나는 지난 한달 간, 그리고 이제까지 그렇게 행복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을까. 온통 비명과 두려움, 공포 그리고 허망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어두운 면들과는 달리 권세모는 반짝 반짝 빛을 내며 자신의 약혼녀와, 자신의 여자, 여자, 여자친구와 함께 자신을 스쳐지나갔다. 그것도 숨도 못 쉬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앞에 두고. 얼굴은 살짝 발그레해진 채.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권세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제야 차하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오랜만에 흡입되는 산소에 폐부가 얼얼할 정도로 따가웠다. 기도에서는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다. 허억, 허억, 급작스럽게 달라진 환경에 폐를 뱉어낼 것처럼 기침을 하면서도 차하나는 살겠다고 숨을 들이마셨다. 산소가 피에 돌고 머리가 좀 맑아지자 그 때서야 차하나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건 아니잖아.”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뚝 메마른 시멘트 바닥에 진한 점들이 수없이 찍혀갔고 이내 큰 원을 만들어냈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권세모.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지. 차하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입 안에서 발음들이 뭉개졌고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의미가 불분명했고 어지러이 찍히는 눈물방울처럼 산산이 흩어졌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로 모아졌다. 깎이고 깎이다 못해 아주 작은 결정처럼 응집된 그것이 하나의 가슴에 박혔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 골목길 한 구석이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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