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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보통날 본문

레트로봇

[또봇/셈한] 보통날

승 :-) 2015. 6. 24. 21:54

[또봇/셈한] 보통날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세모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씻은 뒤에 집을 나섰다. 여기까지는 적어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삼 개월 전의 그 날과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집을 나와 발걸음을 회사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은 틀어졌고 세모의 세계는 어그러졌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세모가 집을 나서면서 늘 하는 생각이었다. 죄책감에 푸욱 젖어, 마치 땅이 자신을 잡아끄는 듯한 무기력감을 느끼며 세모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딛었다. 버스를 타고 어느 병원 앞에 내렸다. 건물은 햇빛을 받아서인지 유난히 하얗고 또 눈이 부셨다. 눈을 살짝 찡그린 세모의 코가 늘 그랬듯이 시큰거렸다.

 

 하얀색은 순백의 색을 가리켰다. 세균하나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청결함의 상징 속에서 마주한 하나는 그들보다 더욱 하얬다. 푸른색의 환자복을 입은 하나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나를 보고 말갛게 웃었다. 세모의 마음 한 구석이 파삭, 하고 부식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모는 애써 그것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이상하게 부서져버린 마음 한 구석은 집에 돌아가서 아무리 접착제로 붙이고, 다시 메워놓아도 그 다음날 하나를 보는 순간 다시 부서져버렸다.

 

오셨어요.”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모는 가방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놓았다. 하나가 평소에 읽던 책, 일기장 따위의 시시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은 세모의 손에는 간절함이 배어나와 있었다. 세모가 입을 열었다. 읽을 걸 좀 가져왔어. 하나에게 그것들을 건네는 세모의 손이 살짝 떨렸고 하나의 옆에 쌓여있는 여러 책들 위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고맙습니다. 말하는 하나의 말투에는 정중함이 묻어나왔다. 세모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세모는 병실을 둘러보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나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 두었는데, 손도 대지 않은 듯 어제와 같은 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사흘 전 까지만 해도, 잘 먹었었는데.


좀 먹을래?”

 

 세모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하나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 그거 별로 안 좋아해요.”

 

 와르르, 세모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각의 기억은 꽤나 오래 남아요.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럼, 앞으론 뭘로 사다줄까? 묻는 세모의 말에 하나가 웃으면서 화답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 그리고 이제 안 오셔도 돼요. 하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모의 가슴을 파고들어 수많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마치 무너질 듯 먼지를 내뿜는 건물 위에서 하나는 뛰고 또 뛰었다. 하나, , , 계속 가해지는 무게에 당장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건물이 풀썩거리며 먼지를 피워냈다. 세모는 그 먼지에 휩싸여 기침을 내뱉었다. 한참을 컥컥거리던 세모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기침을 해서. 그래서.

 

 

* * *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던 하나가 세모의 생일을 잊었을 때였을까? 아니, 그 전에. 세모야. 나 갑자기 수학 공식이 생각이 안나. 이상하지, 매일 외우고 다녔던 건데 말이야. 했던 그날? 아니, 조금 더 앞으로 가야 할까. 대체 언제부터일까. 평소는 늘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가 세모를 마주보고 그의 이름을 잊었을 때. 세모는 하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리고 그 날부터 파도에 바위가 조금씩 침식되어가듯 하나의 기억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열심히 머릿속에서 지우개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상, 가족, 친구, 그리고 모든 것을. 세모는 그 안에 자신이 포함되어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세모는 가장 먼저 지우개의 찌꺼기로 흩어져갔다. 하나가 처음 세모를 보고 누구냐고 물어봤던 순간 사실 세모의 마음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때부터 세모는 매일 매일 그것을 애써 붙여왔고, 하나의 기억이 시간이란 파도에 침식당하는 만큼 세모의 마음도 하나라는 무게에 균열을 더해가고 있었다.

 

누구세요?”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하나가 세모를 보고 표정을 굳혔을 때, 그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나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지 않고 등 돌려 병실을 나갔어야 했는데. 악의 없는 표정과 말투보다 더 슬픈 것은 세모를 쳐다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었다.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불쌍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 나를 그렇게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세모가 고개를 숙였다. 부릅뜬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마저도 이해가 가지 않은 듯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리가 급하게 세모를 이끌고 병실 밖으로 나갔고 세모의 몸은 힘없이 부유했다. 병실 바닥이 푹 푹 아래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어깨에 와 닿는 두리의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마. 자신도 모르게 두리의 손을 거칠게 쳐낸 세모의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지 그 네글자의 단어에 세모와 하나가 조심스럽게 쌓아가던 성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와 파편에 휩싸여 눈앞이 매캐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세모는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마치 날개가 꺾인 새처럼 그렇게 세모는 한참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심연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세모가 현재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은 그로부터 딱 한 달 뒤였다. 한 달 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세모를 짓누르고 괴롭혔다. 그 무수한 감정들의 부유 속에서, 유난히도 세모를 할퀴고 물어뜯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하나라는 존재를 향한 회귀본능. 집 밖을 나서면 어느 새 하나의 집 앞에 서 있었고, 고개를 젓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하나의 학교 앞에 서 있었다. 회사는 그만 둔 지 오래였다. 세모는 웃었다. 허탈하게 웃었다. 참 웃기지. 누군가가 말했던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압도되면 떠오르는 것은 깊은 절망이 아닌 유머라고. 세모는 하나의 학교 앞에서 한참동안을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세모는 하나의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이 찍은 사진을 들고 그렇게 의미 없는 발걸음에 의미를 담아 꾹꾹 발자국을 남겨가며 병원으로 향했다. 새하얀 병원의 외벽에 햇빛이 부서져 내렸고 세모의 코가 시큰거렸다. 햇빛이, 새하얘서. 까맣게 타들어간 세모의 마음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햇빛이 새하얘서. 그래서 그랬다.

 병실 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는 하나의 모습에 세모는 병원 외벽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차하나. 그에 비해, 한 달 동안 번뇌에 시달려 잔뜩 망가져 있던 권세모. 그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고 하나의 의아한 시선이 세모의 몸을 휘감았다. 오롯이 그 시선에 노출된 세모의 입이 우물쭈물하다 겨우 열려 음파들을 내뱉었다. 허공으로, 허공으로 날아간 음파들이 하나에게 닿았을 지는.

 

누구세요?”

기억, 안 나시나 봐요.”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세모는 피를 토하는 느낌이 들었다. 목에서 피가래가 끓는 듯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랫배가 싸하게 소용돌이치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이 병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소리를 마구 질러대고 싶었다. 맘 같아서는, 차하나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한 눈동자에 비친 하나가 너무 예뻐서.

 

, . 보시다시피, 제가.”

 

 상태가. 하고 싱긋 웃는 하나를 보고 세모는 결심했단 듯 가방에서 둘의 사진을 꺼냈다. 만난 지 3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둘만의 사진을 찍었다. 하나가 용돈을 모아 사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들은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위잉-하고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고 잉크가 번질 새라 가만히 필름에 그들의 모습이 스며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두근두근 했던 순간까지 모두 기억하는 나는 무엇이 되는가. 유머는 또 다시 세모의 깊은 마음속에서 입 밖으로 뛰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모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하나에게 사진을 건넸다.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한 모습이었다. 한 겨울에도 서로의 살결을 맞대고 싶다고 손이 꽁꽁 얼어도 장갑을 끼지 않던 둘이었다. 새빨개진 손이 서로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고 환한 웃음이 필름 가득 담겨있었다. 그것을 보면 조금은 기억하지 않을까. 세모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우리 많이 친했었나 봐요.”

 

 이제는 세모가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 많이 친했죠. 세모는 그 다음 사진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혹여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한 사진이었던지라, 세모는 그 사진을 자신의 방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었다. 그것을 꺼내든 세모의 마음 한 구석에서 혹시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됐든 그 사진은 그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었으니까.

 

.”

 

 하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데굴거리며 돌아다녔다. . 이게 뭐죠. 당황스러웠는지 목소리조차 떨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커밍아웃하는 사람 마냥 세모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연신 침을 발랐다.

 

저희가 이런, , , 그런 사이였어요.”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던 세모가 겨우 말을 내뱉었고 하나는 사진을 뒤집은 채 내려놓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럴리가요.”

 

 저희 둘 다 남자잖아요. 한 글자 한 글자가 세모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세모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도저히, 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어 세모는 그렇게 또 다시 하나에게 등을 보였다. 푹푹 꺾이는 무릎을 손으로 짚어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3년의 시간이었다. 서걱 하고 날카로운 칼이 무엇인가를 도려내듯 세모의 인생에서 3년이라는 시간이 베어져 나갔다. 그 빈자리를 도저히 채울 수가 없어 세모는 울고 또 울었다. 다른 것들도 모두 비우기 위함인 것 마냥 세모는 그렇게 울었다.

 

 

* * *

 


 그렇게 병원으로 출퇴근한 지 삼 개월이 지났다. 하나는 자신이 그렇게 내뱉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세모가 그 다음 날 다시 돌아왔을 때 또 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세모는 또 다시 울었고 그 다음 날 찾아갔을 때, 그제야 비로소 세모는 입을 열고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친한 친구였어요.”

 

 아. 하나가 눈을 휘며 웃었다. 저한테도 찾아와주는 친구가 있긴 있네요! 많이 친했나 봐요. 그럼 말 편하게 할까요? 세모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세모는 그들이 아주 어렸을 적 얘기를 꺼냈다. 그래야만 했다. 친한 친구였던 시절은 옛일이었으니까. 세모가 그들이 소꿉친구였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하나는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모는 그것이 거짓된 표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모는 꿋꿋하게 입을 열어 길고 길게 그들의 옛날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 다음 날 세모가 찾아갔을 때 하나는 또 왔어요?” 라고 말했고 세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나세요? 라고 묻자 하나가 그럼요. 라고 대답했다. 그 때 세모는 끝이 없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을 만난 것만 같았다. 그 빛이 꺼질 새라 세모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세모를 기억한지 나흘 째, 세모가 또 다시 하나에게 이방인이 된 것은 세모가 하나의 소꿉친구가 된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삼 개월 동안 세모는 수많은 사람이 되었고 하나와 수많은 관계가 되었다. 한 번은 소꿉친구가 되었다가, 대학 동기도 되었다가, 고등학교 친구도 되었다가, 회사 동료도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던 하나는 세모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회사 나가보셔야죠.”

 

 세모가 냉장고 문을 탁 하고 닫았다. 괜찮아, 너를 위한 일이라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곤두박질 쳤다. 이번에는 언제까지일까. 언제까지 네가 날 기억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만남의 간격이 균열을 더해 폐허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날이 이렇게 또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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