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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미하] 또 새로운 계절이 오겠지 본문

오오후리

[아베미하] 또 새로운 계절이 오겠지

승 :-) 2014. 12. 1. 17:53
[아베미하] 또 새로운 계절이 오겠지

 

D-19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이던 소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 손가락 전부 다 접었다 펴도 모자란 일 수 였는데, 이제는 양 손가락을 접었다 피려고 해도 엄지손가락이 남았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소년은 단지 책상 위에 놓인 달력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 다른 소년이 왠 한숨? 하고 묻자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부드러운 나무색 머리칼이 축 늘어졌다. 빨리 자자. 내일 부턴 또 엄청 지옥 훈련이니까. 까만색 머리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년이 말했다. 

"미하시!"

나무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그제서야 일어나 불을 껐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소년은 맘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미하시! 일어나!"
늘 똑같은 하루이지만 언제나 아침은 힘들다. 룸메이트인 이즈미는 항상 일찍 일어나서 미하시를 깨운다. 아침 잠이 많은 미하시가 '이즈미 군, 내가 잘 못일어나면 얼굴을 찰싹 찰싹 때려줘!' 하고 말한지 어언 1년, 이즈미는 매일 아침마다 미하시의 얼굴을 찰싹 하고 때린다.

"미하시!"

엎드려있는 미하시를 뒤집고 이즈미는 놀랐다. '미하시, 울었어?' 미하시는 그 말에 눈을 번쩍 뜨더니 아니,야! 하고 뛰어나갔다. 이즈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시작된 지옥 훈련. 봄 예선을 위해, 그리고 세대교체가 이뤄진 지금 감독님은 더욱 훈련을 열심히 시켰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9시까지. 다 끝나고 나면 토할 것 같았지만 팀원들 모두 현재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묵묵히 훈련을 따랐다.
열심히 티배팅 훈련을 하고 팀원들은 모두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 때,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아베 선배!"
 
모두들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얼굴에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단 한 명, 나무색 머리칼의 소년. 미하시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물쭈물, 야구 배트만 들고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미하시는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나도 성격이 좋아 아베 선배에게 한 마디라도 쉽게 걸어봤으면. 이제까지 배터리를 하면서도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던 자신의 소심한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내가 이렇게 소심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베 선배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
 
"...시!"
"미하시!"
 
소년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곳을 쳐다보니 팀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미하시는 자신도 모르게 야구배트를 떨구고 팀원들에게 뛰어갔다. '왜 혼자 거기서 그러고 있어!' 하는 타지마의 목소리에 대답을 하려다 미하시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숨을 흡하고 참았다. 숨이 내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미하시에게.
새까만 머리카락이 멋있었던, 항상 든든하게 내 공을 받아주던. 2년 동안 배터리로서 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챙겨주던. 남들은 잔소리가 심하다며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지만, 미하시에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한 구절의 시였고 한 곡조의 세레나데였다. 다이어리 한 구석에 적어 놓은 한 마디는 '55kg까지 살 찌우기! 안 그러면 아베 선배가 공 안 받아준다고 했음.' 일 정도로 미하시에게 아베는 큰 공간을 차지했다.
 
"어, 안녕! 오랜만이다."
 
아베가 입을 열었다. 언제 들어도 멋있는 목소리. 착 깔린 목소리로 '나이스 볼!' 이라고 외칠 때엔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최고의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물론 2학년 말에는 미하시의 어깨에 이상이 생겨 잠시 훈련을 쉬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하시는 행복했다. 최고의 공을. 아베 선배에게. 그리고 그 목표는 갑자원에 가면서 달성되었다. 그리고 갑자원 1회전에서 탈락한 후, 모두는 울었지만 미하시는 웃었다. 선배에게, 선배가 졸업하기 전에 최고의 공을 던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웃었다. 그 경기에서 미하시는 어깨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 미하시를 툭툭 쳤다. 미하시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미하시~ 오늘 어딘가 이상하네~ 하는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다들 배팅 훈련 시작하자!!! 주장 하나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미하시 역시 고개를 꾸벅하고 뒤를 돌았다.
 
"미하시! 잠깐만."
 
아베의 목소리였다. 미하시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왠지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베 선배는 나를 싫어하겠지. 갑자원, 1회전에서 어깨가 고장나 버린 나를. 나 때문에 이기지 못한 건데. 하는 생각에 미하시는 고개를 푹 숙여 발 끝만 보았다.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
 
발끝만 보고 있던 미하시의 눈 앞에 아베의 손이 쑥 하고 들어왔다. 미하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서있는 아베는 얼굴이 빨갰다. 그리고 손으로 시선을 내리자, 아베의 손 위에는 낯 익은 물건이 놓여있었다.
 
 
* * *
 
 
한창 더운 여름 방학이었다. 미하시와 아베는 열심히 티배팅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베가 얼굴을 찡그렸다. 미하시는 틈틈히 아베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베의 표정변화를 알아차렸다. 왜, 왜 그러세요? 하고 말하자 아베는 말 없이 장갑을 벗었다.
아베의 손은 물집이 잔뜩 터지고 굳은 살이 갈라져 엉망이었다. 주장이 되었을 때 아베는 누구보다 책임감을 느꼈다. 제일 늦게까지 연습을 하던 사람도 아베였고, 웨이트를 가장 열심히 했던 사람도 아베였다. 미하시 역시 그 노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베의 손을 보고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선배, 피, 피나요!"
 
아베는 묵묵히 수돗가로 걸어가서 물로 손을 씻고 다시 장갑을 꼈다. 여전히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서, 선배, 그러면 안 돼요! 보건,실이라도,"
"괜찮아."
 
아베는 다시 배트를 쥐었다가 역시 아팠는지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그 와중에도 미하시는 그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곧,
 
"선배님!!! 제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곤 벤치로 튀어갔다.
미하시는 투수인데다가 피지컬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배팅에서는 늘 8,9번을 얻곤 했다. 하지만 아베가 주장이 된 후 미하시는 항상 아베와 티 배팅을 하곤 했다.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 배팅 연습을 열심히 하다보니 미하시의 손도 역시 굳은 살이 잔뜩 배기게 되었다. 물집이 잡히고 터지는 그 기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임시방편으로 대일밴드를 붙였더니 조금 나았다. 미하시는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이었다.
 
"선,배, 여기..."
 
미하시는 대일밴드 통을 아베에게 내밀었다. 아베는 말없이 통을 받아들었다.
 
"뽀로로.."
 
미하시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뽀로로, 입니다. 아베는 픽 웃으며 통에서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 모습도 힘겨워보여 미하시는 얼른 다가가 자기가 통을 꺼내 직접 대일밴드를 벗겨 아베의 손에 붙여주었다. 가까이서 본 아베 손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미하시는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면서도 아베와 손이 닿았다는 생각에 괜시리 얼굴이 빨개졌다.
 
"미하시! 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미하시가 놀라 고개를 들자 아베는 미하시의 손을 붙잡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자꾸 나와서 배팅연습할 때부터 알아봤어. 너는 안해도 된다니까 왜 자꾸 나와서 해가지고 손을 이모양을 만들어! 아프지는 않아?' 아베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하시는 괜,찮아요. 하면서 도망가려고 했고, 그런 미하시의 손목을 붙잡고 아베는 말했다. 너. 앞으로 배팅 연습은 한 시간씩만 해!
 
미하시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아베 선배랑 함께 배팅연습을 할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데. 아무도 없는 운동장, 여름 밤에 단 둘이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을 땐 이 넓은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아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배팅 실력이 아무리 늘지 않아도 미하시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이건 고마워. 하나만 빌려줘도 돼. 다시 가져가."
 
아베는 다시 대일밴드 통을 내밀었고 미하시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선,배 가져가서, 쓰세요. 미하시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물건이 아베에게 있는게 기분이 좋았다. 아베는 고맙다고 간단하게 인사하며 자신의 가방에 미하시의 뽀로로 대일밴드를 넣었다. 미하시는 얼마나 기분이 요상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베 선배 손바닥에 착 붙어있는 뽀로로였으면. 미하시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 뒤로 캐치볼을 할 때도 미하시는 아베의 손이 아플까 공을 세게 던지지 못했다. 결국 쿠사리를 잔뜩 먹고 나서야 미트에 좋은 소리가 나는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지만, 어쩐지 아베 선배는 화가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둘은 한참동안 캐치볼을 하고 나서야 저녁을 먹었다.
 
 
* * *
 
 
"뽀로로..."
 
미하시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눈 앞에 뽀로로 대일밴드 상자가 다시 있었다. 다시 시선을 위로 올리자 머리를 긁적이는 아베가 보였다. 아니 뭐, 딱히, 보관한 건 아니고, 그냥 짐 정리하는데 있길래. 내가 갖기도 뭐해서. 하면서 말하는 아베의 모습에 미하시는 왠지 눈물이 났다.
선배가 그냥 갖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 뽀로로가 계속 아베 선배랑 같이 할 수 있는건데. 미하시는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가볼게."
 
'선배님 가신다!!!!!!!!' 언제 봤는지 타지마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은 또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선배님!!!!! 했다. 미하시는 한 마디만 하면 울음이 터져버릴 것같아서 입술만 꽉 깨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하시는 발에 힘을 꾹 주고 뒤돌아 섰다. 그리곤, 흙을 꾹꾹 밟아가며 티배팅 장소로 가서 자신의 배트를 정리했다. 어, 미하시, 연습 안해? 하는 이즈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미하시는 네트로 가서 셰도우 피칭을 하기 시작했다.
셰도우 피칭을 하면서 미하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어깨가 뻐근했지만, 아직 의사가 하루에 10구 이상 던지지 말랬지만, 미하시는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어디선가 아베 선배가 튀어나와 큰 목소리로 꿀밤을 먹일 것만 같았다. 내가 연습하지 말랬지!!! 그렇게만 되면, 미하시는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열심히 연습해야 돼. 미하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꼭 아베가 들어간 대학 야구부에 들어가야지. 미하시의 목표는 그거 하나였다.
 
'아베 선배의 배터리는, 내가 해야만 해.'
 
그 뒤로도 어깨가 뜨거워질 때까지 미하시는 던졌고,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이즈미가 놀라서 말린 이후에야 미하시는 피칭을 멈췄다. 이즈미의 질책도 들리지 않았다. 더, 열심히 해야해. 미하시의 머릿 속엔 온통 뽀로로 대일밴드 뿐이었다. 다시 아베 선배를 만나서 대일밴드를 붙여줘야지.
 
D-7
 
드디어 날짜는 한자리 수를 돌파했고 이제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미하시는 역시 책상 앞에서 한숨만 쉬었다. 다행히 지옥 훈련은 끝났다. 미하시는 어쩐지 잠이 안올 것 같아 배트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미하시, 나가? 이즈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미하시는 문을 닫았다.
가볍게 몸을 풀고 미하시는 운동장을 달렸다. 아베는 밤에 운동을 할 때 항상 몸을 풀고 운동장을 다섯바퀴 정도 돌았다. 운동장을 돌고 난 뒤 약간 훈훈해진 몸으로 아베는 미하시에게 어깨 스트레칭을 가르쳐줬다. 가끔 미하시 어깨의 상태가 안 좋아보일 땐 직접 어깨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둘은 티 배팅을 시작했다. 그것이 지난 1년 내내 그들의 밤이었다.
미하시는 운동장을 다 돌고 나면 아베가 어깨 스트레칭을 시켜줄 것만 같았다. 두 바퀴, 한 바퀴, 이제 다, 왔다! 하지만 운동장 다섯바퀴를 돌고도 아베는 보이지 않았고, 쌀쌀한 운동장은 깜깜하기만 하고 차갑기만 했다.
아베 선배랑 같이 할 땐 항상 따듯했는데. 미하시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리곤, 곧 아베가 가르쳐준 어깨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미하시! 왼쪽 어깨를, 그렇지!'
'미하시는 몸이 참 유연하네~'
'미하시, 앞으로 공을 던질 땐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더 밑으로 내리도록 해. 요즘에 좀 올라갔더라.'
 
미하시는 아베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배팅을 하기 시작했다. 배팅 한번, 두번, 세번, 아베가 했던 말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깜깜하디 깜깜한 운동장에 미하시의 배팅 소리만이 바람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곧 미하시는 배트를 던져버리고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어깨만 안 다쳤어도, 조금 더 오래 아베 선배와 함께 야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까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기억하지도 않으며 꽁꽁 막아두었던 마음의 벽이 무너지면서 미하시는 엉엉 울었다.
더 오래 아베 선배와 야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울던 미하시는 훌쩍거리며 야구배트를 챙겼다. 아베 선배와 함께 할 땐 그렇게 재미 있었던 티 배팅 훈련도 하나도 재미 없었다. 날씨도 엄청 추웠다. 아베 선배가 없는 운동장은 너무 무서웠다.
 
이제까지 놀림 받던 자기를 구원해준 사람이었다. 이상하고 느린 공을 던진다며 찬밥신세였던 자기에게 사인을 보내준 사람이었다. 처음에 미하시는 단지 아베를 고마운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아베에게 던지는 공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아닌 다른 것이 조금 섞이기 시작할 무렵, 미하시는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남자를? 내가 아베 선배를? 단지 동경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미하시가 갑자원에 갔을 때.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갑자원은 미하시에게 오랜 꿈이었다. 팀원들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루기라도 한 듯 환호했고 기뻐했다. 미하시 역시 기뻤지만 이내 그것이 단지 갑자원에 갔다는 사실만으로 기쁜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베 선배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아베 선배가 자신의 공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미하시가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자연히 아베와 멀어지게 되었다. 미하시는 재활 훈련을 하면서 팀에서 열외가 되었고, 아베는 여느 3학년 처럼 짐정리와 함께 기숙사에서 빠져나가 수험생이 되었다. 미하시는 아베에게 사과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내가 시합을 망쳐버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갑자원에서 탈락한 그 다음 날, 모두가 식당에 모여 밥을 앞에 두고 눈물만 흘렸을 때에도, 3학년들이 울면서 짐을 정리해 기숙사를 나갈 때도, 미하시는 아베에게 사과를 할 수 없었다.
단지 트레이닝 룸에서 어깨에 얼음을 대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그 뿐이었다. 
 
 
* * *
 
 
D-1
 
드디어 그 날이 하루 남았다. 미하시는 괜히 뽀로로 대일 밴드 상자를 툭툭 치기도 하고, 넘어트리기도 했다. '미하시~ 너가 수험생 될 일 있냐. 웨이트나 하러 갈래?' 이즈미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지만 미하시는 콧노래를 불렀다. 한창 우울하더니 왠일이래. 웨이트 안갈거야? 이즈미는 미하시를 독촉했다.
 
"응. 안 가! 이즈미 군, 혼자 가."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듣고 미하시는 뽀로로 대일밴드를 들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면, 전해줄 수 있다. 드디어 아베 선배와 만난다.
미하시는 아베가 대일밴드를 몇 개나 썼을지 궁금해 하며 상자를 열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안에는 이상한 종이 쪽지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미하시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미하시는 가만히 상자를 보고만 있었다. 도저히 종이 쪽지를 꺼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종이 쪽지에 뭐라고 써 있을까, 아니면, 단지 쓰레기를 잘 못 넣은건가? 미하시는 머리가 팽팽 돌아갈 정도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생각보다 두꺼운 종이가 미하시의 손에 잡혔다.
분명히, 대일밴드와는 다른 촉감이다.
미하시는 대일밴드 상자는 던져버린 채 쪽지를 열었다. 쓰레기 같지는 않았다. 쪽지를 여는데 손이 미끄러져 잘 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뒤 한 쪽에 생채기가 난 채로 쪽지는 완전히 펼쳐졌다.
 
-미하시에게.
 
삐뚤빼뚤한 아베의 글씨를 보고 미하시는 벌써 눈물이 났다. 왜 이제까지 대일밴드 상자를 열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미하시는 자신을 원망하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나는 요난 대학에 갈 거야.
 
-너도 꼭 와. 요난 대학을 목표로 해라.
 
 
……
 
 
-거기서 꼭 다시 배터리를 하자.
 
 
 
D-day
 
미하시는 어제의 기억에 얼굴이 빨개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옷장에서 가장 깨끗한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즈미에게 싱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오늘은, 아베 선배의 졸업식 날이다.
 
"미하시, 우리는 두 시까지 모여야 해! 알았지?"
 
미하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졸업식에 가기 전에 꼭 들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아베 타카야', '오키 카즈토시'
 
3학년 두 명의 방이었다.
 
"실례, 합니다."
 
미하시는 문을 열었다. 다행히 잠겨있진 않았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는 텅 비어버린 방의 냄새가 났다. 아무 것도 없는 냄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항상 아베 선배와 오키 선배가 아웅다웅 하던 방이었다. 합숙훈련이라도 하는 날이면 기숙사에 살지 않는 3학년들은 전부 이 방으로 모였었다. 미하시와 타지마 역시 이 방으로 집합당해 선배들에게 음료수 심부름을 당하곤 했다.
그 땐 그렇게 시끌벅적 했는데, 이제는 새로운 1학년들이 들어오겠지.
새 학기가 시작 되면 이 방도 곧 새로운 주인을 맞을 것이다. 미하시는 그 전에 방에 들어와 보고싶었다. 아직 아베 선배를 보낼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텅 비어있는 방을 보니 어쩐지 눈물이 났다. 이래서야, 아베 선배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셈이네. 미하시는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도 확인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해서 한숨을 폭 쉬었다.
이제, 곧 정말로 아베 선배를 보내줘야 하는데.
 
그리고 어디선가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하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그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음, 너는 여기 왜 있냐?"
 
먼저 침묵을 깬 건 아베였다. 이제까지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많은 감정을 담은 눈. 아마 어린아이가 봤어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복잡한 감정이 허공에서 부딪혀 서로 달아나기 바빴다.
미하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베 선배가 있던 방, 다시 보고 싶어서요. 이제 정말 없다는 걸 믿지 못하겠어서요. 새로운 주인이 들어온다는게 싫어서요. 새 주인이 오기 전에 눈에 담고 싶어서요. 하고 싶은 말은 머리 속에서 쿵쾅쿵쾅 뛰어다녔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 무엇 하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선,배는요?"
 
"나는 내가 3년 동안 있었던 방 다시 보고싶어서~"
 
아베는 왠지 속이 시원해보였다. 약간 긴 머리카락이 갑자원이 끝난 뒤로부터 지난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줬다. 항상 짧은 머리카락을 고수하던 그. 항상 더울 때면 대충 수돗가에 가서 머리를 적시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던 그. 항상 마스크를 벗어도 삐죽삐죽 솟아있던 그의 머리카락. 그 무엇하나 선명하지 않은 게 없었는데, 어느 새 머리카락은 속절 없이 자라있었다.
 
"아. 맞다. 편지는 봤어?"
 
미하시는 얼어붙는 듯 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답장은 필요 없어. 약속 꼭 지켜라. 하는 아베의 말에 미하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윽고 아베의 손이 미하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거칠한 손바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항상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
 
미하시는 깜짝 놀라 그대로 아베를 쳐다보았다. 아베 역시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 아니. 뭐 다른 의미는 아니고. 하면서 아베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미하시의 눈꼬리엔 어느 새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또 운다."
 
아베는 미하시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항상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조금만 제스쳐가 커져도 이렇게 눈에 눈물을 머금곤 했는데. 오랜만에 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하시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눈 꼬리에서 쉴 새없이 눈물을 흘렸다.
입술을 꽉 깨물어 울음을 참느라 미하시의 입술은 핏기가 옅어져 있었다.
 
"미하시. 편지에도 썼지만 꼭 요난에 와라. 아직 갈 길이 머니까."
 
그리고 난 꼭 너랑 배터리를 하고 싶으니까. 하는 뒷말은 삼킨 채 아베는 '그러니까 어깨 재활 훈련이나 열심히 해. 나 없다고 괜히 밤에 배팅하러 나가서 울지 말고.' 하고 미하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하시는 눈물을 떨어트리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꼭, 가겠, 습니다!"
 
미하시는 훌쩍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깨 재활도 열심히 할 거라고. 끅끅거리면서 말을 마친 미하시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아베를 쳐다보았다. 아베는 싱긋 웃은 채 미하시를 지나 문 쪽에 섰다.
 
"난 먼저 간다. 졸업식, 늦은 것 같아."
 
아베는 문 앞을 나서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잘 한 일이야. 괜히 혼자 멋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제까지 그가 19년을 살면서 느낀 생각이었다. 내 마음을 표현하면, 우리 모두 불행해질 거야. 그냥 이대로 배터리인 채가 나아. 이렇게라도 오래 보는게 나아. 아베는 마음을 다잡았지만 어쩐지 가슴 한켠이 너무 아려 한참 동안을 일어나지 못했다.
미하시도, 아베도 한동안 문을 사이에 두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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