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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베] 뻔한 결말 본문

오오후리

[하루아베] 뻔한 결말

승 :-) 2014. 11. 29. 20:17

[하루아베] 뻔한 결말

 

「…씨의 차녀 시미즈 료코 …씨의 장남 하루나 모토키

  둘이 인연을 맺어 1월 20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참석하여 축하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넌 지금 이걸 나보고 축하해달라고 보낸거냐.

나도 모르게 담배에 손이 갔다. 이제는 텅 비어버린, 담배를 펴도 날아오는 잔소리가 없어서, 찌릿찌릿하게 째려보는 눈동자가 없어서. 그래서 텅 비어버린. 아무것도 없는 이 집구석이 허전하면서도 눈물나게 차가워서. 그래서 그래. 담배라도 없으면 이 집안에 온기라곤 없을 것 같아서. 라이터를 키면서 이 청첩장에도 불을 붙여버릴까 생각했다. 차라리 욕을 하면서 이놈의 종이를 불질러버릴까. 아니면 드라마처럼 찾아가서 깽판을 부릴까. 그런데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어떤 상상도 할 수가 없다.

 

 10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댔는데 그 말이 맞긴 맞나보다. 네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만나 결혼한걸 보면.

 나는 무릎 부상이 좀처럼 낫질 않아 야구로의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너는 3학년 때 어깨부상을 당해 프로도, 대학진학도 모두 포기했지. 너는 재수로, 나는 현역으로 대학에 들어간지 딱 한 달. 네가 찾아왔다. 한 번만 더 도와달라며. 네가 없으면 난 죽을 거라며. 시니어 때처럼 딱 한 번만 더 날 구원해 달라고 그렇게 너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도와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았고 우리 둘 다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지. 이제는 둘 다 야구에는 전혀 미련 없는 듯, 전혀 관심 없었단 듯 서로 그 날 있었던 일을 자랑하듯, 하소연하듯 말했고, 상사의 욕을 하며 술을 한 잔 하기도 했고 회식이 있던 다음 날엔 서로의 속을 풀어줄 해장국을 만들어주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누가 먼저 사귀자 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어째 그렇게 됐었지.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가 더 이상 술을 진탕 마시지 않고도 몸을 섞게 됐을 때. 그래,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이 잘 안 풀린단 느낌을 받았을 때, 아니면 상사에게 진탕 깨지고 들어왔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받고 싶어서였는지 사랑받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어쩌면 과거가 생각난 걸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는 마치 학창시절의 기억은 잊어버린 양 그렇게 과거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어떻게보면 그 과거는 우리에게 있어 입안의 상처와도 같았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건드리면 너무나도 아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그런 상처.

 

 그런데, 너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 했었나. 그리고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 했었나.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었나. 사랑한다고 말 해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자연스럽게 사랑해서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던 걸까. 나는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더욱 더 모르겠어. 네가 날 사랑한 건지, 내가 널 사랑한 건지. 적어도 네가 날 사랑했다면 과연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얻어맞은게 아닌데도 얼얼해진 뒷통수에 손을 갖다댔다. 담배도 그대로 재가 떨어져 내려 손에 묻었지만 뜨겁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 다 식어버린 재가 된 것 처럼. 담뱃재는 불이 붙은 담배를 떠난 후 부터 빠르게 식어간다. 나도, 너도 그렇게 서로를 떠난 뒤 부터 빠르게 식어갔겠지. 그리고 너는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이렇게 처량하게 혼자 담배만 피고 있어. 마치 재를 떠나보내는 담배 같이.

 

 나는 너를 모토키 선배라고 불렀다. 16년 동안이나.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 내가 스물 아홉이 될 때까지 너를 선배라고 불렀다. 야, 너, 이 새끼, 개새끼 등으로 부른적도 물론 있었지만 결국에 나는 너를 선배라고 불렀다.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어. 나는 너를 한 번이라도 모토키 라고 불러보고 싶었는데. 16년 간 내가 너를 선배라고 불렀던 건, 그건 나중에 우리가 다른 관계가 되었을 때 너를 다르게 부르고 싶어서, 그래서였는데… 이래서야, 너는 영원히 나에게 선배가 될 수 밖에 없겠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땠을까. 나는 너를 16년 동안 보면서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못했는데, 그 여자는 몇 개월을 만났을지 몰라도 너를 이름으로 부르고, 너의 이름을 가져가겠지. 그리고 심지어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는 그걸 상상할 수가 없다. 상상하기 싫은 게 아니라 상상할 수 조차 없어. 온 몸에서 거부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내 머릿속에서 그 주제를 꺼낼 수가 없다.

 

 장장 16년을 만난 우리가 결국엔 이렇게 됐다. 어떻게 보면 이건 정해진 결말이 아니었을까.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된 걸 보면. 그러나 현실에 부딪힌 우리가 선택한 길은 이렇게 다르다. 같은 상황 속에서 너는 나를 두고 현실로 도망갔다. 그래, 물론 우리가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았지. 영원히 서로를 사랑할 거라고, 서로 밖에 없다고 힘든 생활 속에서 달콤한 말뿐인 것으로 자위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선택했는데. 너는,

 

 결국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결말은 다 뻔하지. 어쩌면 우리는 그런 뻔한 결말을 두고 서로 양 극단으로 달려갔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몸짓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결국엔 결말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을. 우리 모두가 뻔히 이런 결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한 길이 이다지도 다른 것을, 너를 탓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데도 너는 그렇게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이제와서.

 같이 산 지 10년이 지난 이제서야. 내가, 네가,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나의 청춘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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