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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하루] 지워지지 않는 흉터 본문

다이에이

[쿠라하루] 지워지지 않는 흉터

승 :-) 2014. 12. 30. 23:07

[쿠라하루] 지워지지 않는 흉터

 

키스톤 콤비. 2루수와 유격수의 연계 플레이를 말한다. 사실 그딴 건 다 필요 없어. 그냥 딱 맘이 맞는 사람이 있거든. , 료상? 이제까지 호흡 맞춰왔으니까. 잘 맞는 분이었지. , 그렇다고 지금 너랑 안 맞는다는 말은 아니야. 앞으로 맞춰 가면 되는 거니까. , 그렇게 생각해.

 

쿠라모치는 본인도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찾아온 작은 코미나토가 '선배와 호흡을 잘 맞추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했기 때문이다. 아니, 호흡을 잘 맞추려면 어떻게 해?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쿠라모치는 얼빠진 표정을 짓곤 이내 나오는 대로 내뱉은 것이다.

하지만 이 불쌍한 작은 코미나토는 수긍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뭐 입꼬리를 보아하니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작은 코미나토는 이내 그 조그만 입으로 말했다.

 

"형보다 더 선배와 잘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말이 마치, 나는 형보다 뛰어난 2루수가 되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쿠라모치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 아마 10년이 지나도 안 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면 상처받으려나? 쿠라모치는 잠깐 동안 생각했다.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굳이 형을 의식할 필요가 있겠니? 그냥 너 하던 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복잡하게 둥둥 떠다녔다. 쿠라모치는 이 생각들 중 하나를 뜰채로 건져 작은 코미나토에게 던져줘야만 했다. 상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잔뜩 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생각 외로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미덕을 가진 쿠라모치는 그 생각들 중에서 작은 코미나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발언들을 솎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분홍머리 소년-쿠라모치가 동경했던 선배와 같은 머리색을 가진-은 그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연습을 더 많이 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래두. 쿠라모치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쿠라모치는 이내 이 작은 코미나토가 하는 발언의 목적이 비단 '키스톤 콤비의 찰떡궁합!' 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였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만한, 아주 미묘하게 섞여있는 그 잔향이, 쿠라모치로 하여금 어딘가 까끌까끌하게 만져지는 지울 수 없는 흉터와 같이 다가왔다.

'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정말로, 쿠라모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작은 소년에게서 믿기 힘들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져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니, 고작 응. 그래. 열심히 하렴! 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평소의 차분하고 조용하던 작은 코미나토와는 다른 사람인건가?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마치 작은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그들 사이에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래."

 

더 열심히 하자. 상투적인 말로 쿠라모치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마치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짙은 안개처럼 느껴져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작은 코미나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고 대답했다. 그럼, 쿠라모치는 힘을 내라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되게 말랐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작은 코미나토는 쿠라모치 쪽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 * *

 

그 뒤로 새로운 키스톤 콤비는 나름 호흡을 잘 맞춘다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누군가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각자 하던 일을 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쿠라모치는 원래 하던 유격수 포지션을 잘 해냈을 뿐이고, 하루이치 역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잘 해냈을 뿐이다. 딱 거기까지. 어떻게 보면 기계적이었다. 수비를 함에 있어 공을 잡고, 던져서 아웃을 잡는다는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을 둘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 한 달이 지난 후, 쿠라모치는 더 이상 자신이 수비를 할 때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료스케 선배와 함께 수비를 할 땐 상대방을 아웃시키는 것 말고도 감정이라는 것이 섞여있었다. 수비를 하면서 기쁨, 슬픔, 뿌듯함 등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기계적으로 공을 받아서 던지고, 베이스를 밟는 것뿐이었다. 작은 코미나토 역시 그렇게 느끼는 듯 했다. 무언가 잘 안 풀리는지 경기 내내 한숨을 쉬었던 적도 있었다. 쿠라모치는 그것을 목격했지만, 굳이 가서 위로를 해주거나 조언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다. 어쩌면 쿠라모치의 깊은 내면에서는 작은 코미나토를 거부하는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쿠라모치가 하루이치를 부를 때 작은 코미나토라고 부르는 것도 그랬다.

그 발음, 그 음절을 말할 때마다 쿠라모치는 흠칫했다. 이제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서일까, 사실 그 자리를 대신해서 차지한 하루이치를 볼 때마다 쿠라모치는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그런 이질감을 느꼈다.

, 신경 쓰여 죽겠네. 쿠라모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신의 앞, 옆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그마한 등이 어느 새 두 개가 아닌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는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다야?”

 

연습 한 세트가 끝나고, 다들 땀에 흠뻑 젖어 바닥에 누워있을 때 누군가 쿠라모치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눈을 감고 있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쿠라모치는 벌떡 일어났다. 선배! 쿠라모치의 얼굴에 반가움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상대는 싱긋 웃고 있었다. 빠져가지고. 체력이 왜 그래? 그 정도면 운동장 한 바퀴는 더 돌 수 있어야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료스케 선배였다. 순식간에 쿠라모치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얽혀지는 시선. , 아무리 예전 파트너여도 그렇지 쿠라모치한테 제일 먼저 가냐? 핀잔이 잔뜩 담긴 준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라모치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잘 하고 있어?”

 

료스케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잘 하고 있냐고. 쿠라모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잘 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위치인건가. 잠깐 고개를 숙인 쿠라모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 잘 하고 있지요. 입은 웃고 있었으나 그 끝이 썼다. 상대는 여전히 웃는 낯이라 더 입이 썼다. 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는데. 지금 그 사람이 같은 얼굴로 내게 잘 하고 있냐고 묻는다. 쿠라모치는 어째 료스케 선배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가버릴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플레이가 엉망이던데?”

 

? 쿠라모치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선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번에 봤어. 경기 중에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쿠라모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람 마음을 잘 간파하는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신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 정도로 티가 나는 플레이를 했던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쿠라모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속에는 여러 감정이 묻어있었다.

 

알아. 17년 동안 같이 살았으면.”

 

쿠라모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얘기가 아닌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아니라고? 그럼 그 말은 작은 코미나토가 문제라는 건가? 쿠라모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료스케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다가왔다. 너도 마찬가지고. 어깨를 툭 치고 그렇게 료스케 선배는 자리를 떠났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쿠라모치는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경기할 때 료스케 선배와 작은 코미나토가 겹쳐 보이는 것도 짜증이 났는데, 지금 료스케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무언가를 훔쳐보다가 들킨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리 잘못된 건 아닌데, 쿠라모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딘가 찜찜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돌린 시선 끝엔, 작은 코미나토가 있었다.

 

!”

 

작은 코미나토는 화들짝 놀란 뒤 자리를 떠나버렸다. 쿠라모치도 얼떨결에 같이 놀라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진짜 이 상황 뭔데! 쿠라모치는 애꿎은 바닥만 발로 퍽퍽 차댔다. , 진짜 형제가 쌍으로 기분 복잡하게 만드네.

 

* * *

 

그날 밤 쿠라모치는 잠을 설쳤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게 뭔데? 쿠라모치는 곰곰이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거리며 생각의 바다에 잔뜩 잠겨있을 때 쯔음, 그 속에서 까끌까끌한 흉터가 느껴졌고 쿠라모치는 그 흉터를 만지작댔다. 그러자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고, 배경 속에 갇힌 쿠라모치는 눈을 번쩍 뜨고 싶었다.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고, 몸과 달리 마음은 마치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그 기억들을 헤집었다. 마치 이제 갓 아물어가는 상처를 다시 잡아 뜯어 피를 보는 기분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상처 속에서 쿠라모치는 그 날로 되돌아갔다.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에이스의 방망이 입니다!’

 

투 아웃을 남겨두고 처참하게 패배한 그 날의 기억은 쿠라모치에게 있어 금기사항이었다.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되는 그런 비밀. 그 때는 이유를 몰랐다.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고, 무엇보다 기분 더럽잖아. 그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어왔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여기로 되돌아왔는가?

쿠라모치는 그 날의 본인이 되어 다시 그 괴로운 장면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쿠라모치는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쿠라모치는 어떤 점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점이 무엇인지 파악한 순간 다시 눈을 뜨려고 발버둥쳤다. 그의 시선에 끝에는 어떤 남자가 울고 있었다.

 

정말 강인한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우는 건 둘째 치고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라 그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울고 있었다. 쿠라모치는 회상 속이었으나 그 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동경하는 대상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모습. 그 것을 보면서 쿠라모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회상 속에서 쿠라모치는 어딘가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왜,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지? 쿠라모치는 머리가 얼얼했다.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이제껏 2년 동안 야구부를 하면서 지냈던 시간들 속의 쿠라모치였다. 그 영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쿠라모치도,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쿠라모치를 보고 사와무라는 침을 묻혀 닦아내려고 했다. 선배! 잠 설치셨습니까? 완전 팬더가 따로 없습니다! 쿠라모치는 한숨을 푹 쉬고 사와무라를 밀었다. 선배! 저를 밀어내시는 힘이 예전과 다른 것 같습니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쿠라모치는 대답할 여력도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샤워하면 좀 정신이 들려나. 샤워실로 들어간 쿠라모치는 익숙한 뒷모습에 흠칫 놀랬다. 아니, 사실 현재 정신상태로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마냥 놀랐다. 어제 기억 속에서 내내 쿠라모치를 괴롭히던 사람과 거의 똑같은 뒷모습. 쿠라모치는 그것이 작은 코미나토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놀랐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작은 코미나토가 깜짝 놀라 뒤돌아봤고, 이내 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래. 쿠라모치는 손을 슬쩍 들어 보인 후 샤워기 앞에 섰다. 최대한 떨어져 앉는다고 앉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힐끔힐끔 쳐다보게 되는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저놈의 등. 저놈의 머리색. 쿠라모치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쿠라모치는 결심한 듯 거울을 바라보았다. 료스케 선배가 떠난 뒤 계속해서 느껴지던 이 찜찜함은 사실 료스케 선배와 작은 코미나토가 겹쳐 보여서였다. 쿠라모치는 그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른 체 했을 뿐. 하지만 어제 쿠라모치가 2년간의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본 결과,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만이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2년 동안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만들어져 온 흉터가 더 이상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그 흉터와 새로운 상처가 맞물려보였을 때의 혼란. 쿠라모치는 자신을 괴롭히는 그 두 가지의 상처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 가볼게요.”

 

하루이치가 쿠라모치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샤워기로 찬물을 얼굴에 대고 있던 쿠라모치가 샤워기를 얼굴에서 떼고 하루이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이따 수업 끝나고 같이 배팅 연습 하자.”

 

깜짝 놀랄 줄 알았던 작은 코미나토는 놀라지도 않고 그저 싱긋 웃었다. 그 입꼬리가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서, 쿠라모치는 다시 눈이 흐려졌다. . 작은 코미나토는 그 때와 같이 인사를 꾸벅 하고 샤워실을 나갔다. 쿠라모치는 거울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보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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