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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수506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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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수506호.

승 :-) 2015. 1. 4. 23:47

[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506.

 

 

"옆에 앉아도 돼요?"

 

91. 조금은 선선해진 날씨와는 반대되는 따가운 햇빛에 가을 내음이 약간씩 섞여들어 올 무렵이었다. 여름 방학을 신나게 보낸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학교로 밀려들어와 방학동안 한산했던 학교가 북적거렸다. 여느 개강과 다름없이 설레었지만 그 정도는 1,2년 전과 확연히 달랐다. 이젠 슬슬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이게 나이를 먹어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하나는 강의실 책상에서 공부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이제까지 단순히 9월 초의 가을날이었던 학교가, 순식간에 설레임으로 가득 찬 순간이.

 

"자리 있어요?"

 

입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하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을 뿐인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충 뒤로 넘긴 머리에, 목에 건 헤드폰. 그리고 들린 목소리. 어느 것 하나 사소하지 않은 게 없었으나 또한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강의실이 텅 비고 그 사람만 보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사람이 가방을 책상에 올리고 옆 자리에 앉는 그 사소한 행동에 이제는 심장이 뛰는 게 옷 밖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심장이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정신 차려! 하나는 차가운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다. 하나는 차가운 자신의 손에 새삼 감사했다.

 

"이거 K교수님 수업, 맞죠?"

 

하나는 깜짝 놀라 그만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말 좀 그만 걸어라! 하나는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얼굴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도저히 들 수 없어 숙인 상태로 네, 하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하나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하나는 첫눈에 반한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냐? 두리를 비웃었던 몇 달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게 가능했구나.

 

사람들이 많은 강의여서 그의 자리는 하나의 자리와 딱 붙은, 바로 옆자리였다. 눈을 살짝만 돌려도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헤드폰을 듣고 있구나. 음악 좋아하나? , 핸드폰은 아이폰이구나. 어울린다. 그의 주변을 관찰하던 하나가 헉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하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가 옆을 쳐다봤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는 그 순간이 영원한 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사람이 많아 웅성거리던 강의실이 고요했다. 그와 자신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고요함에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 아니요."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하나는 그와 대화를 나눴구나라는 것에 대한 자각을 했다. 얼떨결에 대화를 하고 나서 하나는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뒤에 이어진 출석 체크에도, 이름이 두 번이나 불린 뒤에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본 사람한테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말도 안 되거니와 애초에 남자였다. 하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이건 논리에 안 맞아. 그렇게 생각하니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가 조금 가시는 것도 같았다. 오늘은 개강이고 하니까 그 설레임 때문에 착각한 거다. 마침 심장이 마구 뛰는 타이밍에 이 사람을 본 걸 거야. 다음부터 이 사람을 피해서 앉으면 될 일이다.

 

 

", 당장 다음 주부터 조별과제네요. 만나서 얘기하고 일정 잡아야 될 것 같은데, 이름이?"

"차하나,입니다."

 

하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다음 주부턴 자리를 옮길 거라 결심했는데 이놈의 교양 수업 조별과제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함께 조를 이뤄야 했다. 하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조금 더 이 사람에 대해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고, 동시에 자신의 논리가 깨져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쪽은?"

권세모.’

권세모입니다.”

 

하나는 스스로 담담하게 물어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미 출석을 부를 때 그의 이름을 알아두었던 것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 하나는 자신이 왜, 그의 이름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그가 출석체크를 할 때 어떻게 대답하는지 집중했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권세모라는 이름 세 글자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연락드릴게요. 제가 지금 바로 수업이 있어서. 핸드폰 좀,”

 

그는 그렇게 말했다. 수업이 바로 있구나. 순식간에 하나의 머릿속에 시간표가 그려졌고 그 중 목요일의 탭에 색깔이 칠해졌다. 하나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꾹꾹 번호를 입력하는 그의 손은 조금은 투박했다. 여리여리하고 고운 자신의 손과는 다른 모양의 손. 하나는 여기요, 하고 내미는 그에게서 핸드폰을 받다가 마주친 손에 놀라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따듯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항상 차가운 자신의 손과는 반대되는 손. 하나는 그와 닿았던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마치 그 체온을 유지하려는 듯, 혹은 지워버리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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