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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수506호.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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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수506호. -3-

승 :-) 2015. 1. 13. 00:08

[또봇/셈한] 과학과 인간의 문명, 수506호. -3-

 

 

눈앞에 케이크가 들이밀어졌다. 우리 오늘 5년 째 만나는 날이야! 축하해, 세모야.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케이크 위에는 초 다섯 개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초를 바라보고 있자니 세모는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자신의 지난 5년을 보았다. 일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지난 나날들. 그리고 겨우 찾은 이 곳에서 세모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모의 상태는 비유하자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상처투성이로 겨우 구조되어 치료를 받아 이제 첫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였다. 즉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걸음이 무너질지 아무도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의 한 발자국.

 

감사해요, 선생님.”

 

상담실 문을 닫고 나서 세모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많이 나아졌네, 세모야.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니? 선생님은 그렇게 물어보셨다.

좋은 일.

내 인생에 그런 게 생기기는 하는구나. 세모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어쩐지 눈물이 함께 묻어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에 찬바람이 얼굴에 닿으면서 코가 시큰했다. 세모는 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모 자신이 자신의 의도로 감정을 표출해내고 싶어 했던 것.

 

어릴 때부터 세모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그래서 더욱 조심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큼 세모에게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세모는 갈기갈기 찢겨진 채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감당하기 힘든 폭력에 처음에는 저항했다. 하지만 그 폭력의 근원이 자신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 세모는 자신을 놓아버렸다. 스스로 자신의 살을 깎아내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 생활이 지속된 지 1, 부모님은 세모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하아, 가을이다. 세모는 더 이상 지난 시절을 떠올리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세모는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저 내일은 딱 점심시간 비는데 그 때 같이 밥 드실래요? 조별 과제로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차하나.

 

세모는 핸드폰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기억의 망각이란 이리도 무서운 것이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어린 날의 흉터가 세모의 목을 옥죄었다. 즐거운가보네. 잘 지냈어? 그렇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세모는 조용히 되뇌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세모는 이제껏 속으로 울고 또 울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니?’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좋은 일. 그런 거 없어요. 아니, 없어야만 해요. 세모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우겨넣었다.

 

 

* * *

 

 

대학에 들어온 지도 3년이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세모는 그나마 바빴던 지난날들에 감사했다. 조금이라도 혼자 생각에 빠지게 되면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모는 이제까지 모든 학점을 최대로 채워들었고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다. 덕분에 성적은 우수했고 부모님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단지 그런 의미였다. 세모에게 대학생활이란. 열심히 움직여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곳.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나와 살아서 더 그랬다. 세모는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생활하길 바랬고 그래서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지원했다. 결론적으로 자취를 하게 되었지만, 세모는 이 생활이 즐거웠다. 하루 종일 힘들게 공부하다가 집에 와서 생각할 틈 없이 잠들어버리는 것. 세모는 대학에 온지 2년 만에 약 없이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도 세모는 학점을 꽉 채워 듣고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평이 난 교양 수업이지만 세모는 그것도 즐거웠다. 그럼 학생들이 별로 없겠지. 세모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 강의실에 들어갔고 깜짝 놀랐다. 먼저 학생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 강의실을 꽉 채운 빽빽한 머리통에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사람이 많은 건 싫다. 언제 저 얼굴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조롱과 환멸의 말을 내뱉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모는 벌써부터 얼굴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단 한사람.

그리고 단 한자리.

 

쭉 둘러본 강의실에 빛나는 얼굴이 있었다. 조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빛나는 얼굴. 잘생겨서가 아닌,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빛을 뿜어내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면 나까지도 좋은 에너지로 가득 찰 것 같은 사람. 세모는 그를 보자마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모는 재빨리 그의 옆자리로 갔다. 마치 운명처럼 꽉 들어찬 자리 속에 그의 옆자리만은 비어있었다.

 

자리 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모는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평소엔 강의 시작 전에 헤드폰으로 노래를 듣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옆에 있는 사람과 말을 섞고 싶었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세모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오버하는 걸 거야. 아닌가? 괜찮을까? 6년 만에 찾아온 두근거림에 세모는 어쩐지 당황스럽고 생소하단 느낌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리고,

 

이거 K교수님 수업, 맞죠?”

 

갑자기 말을 걸어서인지 놀라서 움찔한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세모는 그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어쩐지 감동했다. 자신이 거는 말을 무시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방향이면 니가 어쩔건데. 더러운 새끼야.’

 

순식간에 귓가에 어떤 목소리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세모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아니야. 세모는 확신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세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모는 당황했다. 저 눈. 저 눈동자. 그도 세모와 같은 눈빛을 갖고 있었다. 한참동안 시선이 얽히고, 세모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세모는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말. 어디 불편하니? 괜찮니? 약 가져다줄까? 세모는 말을 하고도 당황했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말이었기에 내뱉었을 뿐인데 상대방에게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했다. 세모가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하나, 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상대방이 대답했다.

 

, 아니요.”

 

상대방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어렸을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세모는 머리에서 어떤 막이 하나 벗겨진 기분이었다. 웃긴 말이었지만 세모는 그제서야 주변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마치 죽어가는 물고기를 물에 풀어주어 살려주듯이,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비웃을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런 입장이어서 잘 알아챈다고는 하지만, 속단하기엔 일렀다. 그런 생각이 위험하다는 것은 세모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만 했다. 예전의 세모라면, 절대, 전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기분이었다. 세모는 어느새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어느 것이라도 좋았다. 당신은 빛이 나는 사람이야. 세모는 그의 빛이 자신에게로 서서히 옮겨오는 것을 보았다.

 

빛나는 사람.

 

세모는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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