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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공한] 열심(熱心) 본문

레트로봇

[또봇/공한] 열심(熱心)

승 :-) 2015. 1. 5. 23:02

 

*BGM을 클릭해서 들어주세요!*

 

[또봇/공한] 열심(熱心)

 

너는 마치 동백과 같았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도 고고하게 네 향기를 퍼뜨리는, 그런 아름다운 꽃.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하이얀 도화지 위에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듯 피어오르는 동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동백은 떨어질 때 목을 떨구지. 그 자체로 피를 연상시키나 막상 생명이 다할 땐 피를 흘리지 않아. 깔끔하지. 마치 너처럼.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한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사랑해. 사랑해서 너를 그대로 가두고 싶어. 넌 그대로 내게 동백으로 남아 있어 줬으면 좋겠어. 좋아해, 하나야.

 

 

하나는 다이어리를 덮고 뒷걸음질 쳤다. 하얀 조명에 닿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하나는 상황파악이 어려웠다. 저 어딘가 기괴한 문장에 쓰인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는 무엇인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리고 당장 이 장소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건 잘못됐어. 무엇인가 단단히 꼬였어. 하나는 누구 하나 없는 이 집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살금살금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고 열린 문에는,

 

, 하나야.”

 

그가 서 있었다.

 

하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넘어져버렸다. 바닥에 넘어진 자세로 하나는 떨었다. 단지 저 그로테스크한 문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 동안 그가 풍겨왔던 분위기와 저 구절들이 합쳐져 지금 이만큼의 공포를 하나에게 선물했.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나는 그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온화한 그의 얼굴 속에서 하나는 그의 얼굴 틈 사이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는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언제 나를 죽일지 몰라. 나는 목이 떨어지고 말거야.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감쌌다. 그러자 그가 고개는 하나를 향한 채 시선만 힐끗 올려 책상을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하나는 눈치를 챘다. 너무 놀라서 다이어리를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했다는 것을.

 

아아.”

 

봤구나.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부정도 하지 못할 정도로 증거가 명백한 이 상황에 하나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도망가고만 싶었다. 가능한가? 하나는 어떻게든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차하나,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

하지만 없었다. 이 집안에서 하나가 나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다. 그는 하나에게 목줄을 채워두었다. 본인 입으로는 목줄은 취향이 아니라 실제로 채우기는 어렵다고 가볍게 말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하나에게 목줄보다 더한 구속복을 입혀두었다. 보이지 않는 구속복.

 

하나에게 그 집은 마치 투명 비닐로 만들어진 집과 같았다. 언제든지 하나를 지켜볼 수 있는 투명한 공간. 모든 것이 일일이 드러나 까발려지는 공간. 하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구속받고 있었다. 그 공간 밖에는 많은 눈들이 항상 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가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시도하면 그 얇디얇은 투명 비닐 막에서 손이 뚫고 나와 하나의 발목을 낚아 챌 수 있었다. 그 곳은 그런 공간이었다. 하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봤어?”

 

여전히 그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는 그 웃음이 참 포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어딘가가 쑤셔오는 듯 아팠다. 저 웃음은 나를 해칠 거야. 하나는 그렇게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하나가 누구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지 들킨 순간부터, 하나는 지금 이런 온몸을 옥죄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와 하나만 존재하는 외딴 성 같은 공간. 미치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작은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한폭탄의 시간이 00:00을 표시한 시간.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하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네가 날 동백이라고 표현한 거, 봤어. 정말 끔찍하고 역겹더라. 너는 정말 그럴 사람이잖아. 얼마든지 나를 그대로 포르말린 병에 넣어 둘 수 있는 사람이야. 그 병을 안고 아름답다고 고백할 사람이지, 너는. 그 말이 뱃속에서부터 꾸물거렸다. 하지만 하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단지 덜덜 떨리는 턱을 주체할 수가 없어 손으로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야.”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는 그 목소리에 취했었다. 그러나 지금 하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뱀처럼 귀를 넘실거리면서 핥아 올리는 그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뾰족한 바늘로 바뀌어 하나의 고막을 찢어낼 것만 같았다. 하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의 목을 타고 나오는 소리는 쇠를 긁는 듯 듣기 거북했다. 그리고 곧, 하나의 손과 발이 차가워졌다. 몸이 뻣뻣해지고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하나는 점차 주위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좌절했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그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뻣뻣해진 하나의 위로 올라가 얼굴을 짓누르듯 감싸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얼마가 지났을까, 하나의 숨소리가 안정되고 뻣뻣해졌던 몸이 다시 말랑해지기 시작했다.

 

숨 똑바로 쉬어, 하나야.”

 

하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숨을 죽였다. 누구나 아픈 것은 괴롭다. 하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괴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절망 등이 섞인 그 눈물에 그 남자는 입을 맞췄다. 하나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하나가 힘겹게 말하고, 그는 하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하나의 눈을 찌르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곤 이내 그것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의 의식이 흘러가는 방향이 어딘지 하나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뒤로 넘긴 머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는 그저 몸만 떨었다.

 

좋아하니까.”

 

그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전히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당연한 이치를 읊듯 말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이 현실에 하나는 절망했다.

 

좋아하는 건 이런 게 아니야, 오공아.”

나한텐 이런 거야.”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의 방식이 맞다고. 하나는 숨을 삼켰다.

 

나랑 있어, 하나야.”

 

나랑 있자, 하나야. 그럼 다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 그는 하나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하나는 그 안에서 일순간 안락함을 느끼는 자신을 저주했다. 그렇게 또 하루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나야, 동백은 추운 날씨에도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다가 시들 땐 그대로 목이 떨어진대. 우아하지 않아? 너무 아름다워. 자존심은 그대로 세우면서도 아름다움도 여전히 유지해. 그 무엇하나 너랑 닮지 않은 게 없어. 나는 하나 네가 동백처럼 그대로 꽃을 떨굴 때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어.”

 

사랑해, 하나야. 오공은 속삭였고 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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